모든 것이 빠르고 자극적으로 소비되는 숏폼과 OTT의 시대, 스크린을 압도하는 것은 화려한 CG와 수백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들이다.
흥행 공식과 투자사의 데이터가 캐스팅의 최우선 기준이 된 오늘날의 영화판에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통해 공개된 송일곤 감독의 신작 ‘여전히 찬란하게’와 주연 배우 김혜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잔잔하지만 묵직한 파열음을 낸다.
“원래는 활동을 안 하려 했습니다.” 85세의 ‘국민 대배우’ 김혜자가 털어놓은 이 한마디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반세기 넘게 대중의 희로애락을 연기해 온 거장에게 연기란 매 순간 자신의 혼을 갈아 넣는 고단한 작업이었을 터다. 체력적인 한계와 완벽주의 사이에서 은퇴를 고민하던 대배우를 다시 카메라 렌즈 앞으로 이끌어낸 것은 수십억 원의 개런티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아니었다. 오직 감독의 ‘미련한 진심’뿐이었다.
송일곤 감독은 김혜자를 캐스팅하기 위해 직접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손편지를 쓰고, 무려 6번이나 찾아가 설득하는 ‘삼고초려’ 이상의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는 최근 한국 영화계의 캐스팅 관행과 철저히 대비된다. 언제부턴가 충무로는 배우의 티켓 파워와 SNS 팔로워 수, 트렌드 지수라는 건조한 숫자에 기대어 배우를 ‘선택’해 왔다.
이러한 기계적인 캐스팅 시스템 속에서 시니어 배우들은 서사의 중심에서 밀려나 누군가의 조부모나 전형적인 희생양 역할로 기능적으로 소비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송일곤 감독은 작품의 영혼을 불어넣을 단 한 명의 적임자를 위해 시간과 정성을 쏟았다. 거장 배우와 감독 사이에 오고 간 신뢰와 진정성은, 효율성만 좇느라 ‘사람’을 잃어버린 현 영상 산업에 캐스팅의 진정한 미학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황혼기에도 계속되는 예술적 투혼…배우 김혜자의 ‘여전한 찬란함’
김혜자의 스크린 복귀가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녀가 매 작품 보여주었던 경이로운 연기 스펙트럼 때문이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시간의 야속함과 삶의 눈부심을 동시에 증명했고, 영화 ‘마더’에서는 모성애의 광기를 섬뜩하게 그려냈던 그다. 삶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모든 짐을 내려놓으려 했던 배우가, 감독의 진심에 응답해 다시 한번 대중과 깊이 교감하기로 결심한 것은 그 자체로 숭고한 예술적 투혼이다.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라는 제목은 어쩌면 배우 김혜자 그 자체를 향한 헌사일지 모른다. 세상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져도, 배우의 얼굴 주름 하나, 떨리는 목소리 한 자락이 주는 압도적인 서사는 AI나 화려한 자본이 결코 대체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25년간 수많은 스타의 명멸을 지켜보며 확신하게 되는 불변의 진리가 있다. 진정성을 이기는 기교는 없다는 것이다. 85세의 나이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작품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을 택한 김혜자, 그리고 그 가치를 알아보고 끝까지 매달린 송일곤 감독. 이 두 거장이 빚어낸 스크린 속 앙상블이 올가을 극장가에 얼마나 찬란한 위로를 던질지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