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이라는 수식어도 이제 부족하다. 올해로 배우 인생 20년 차, 수많은 인생작을 배출하며 사랑을 받아온 박보영은 사람들이 정해놓은 선을 비웃듯,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러 또 한 번 ‘연기의 정점’을 찍으며 활짝 날아올랐다.
시작부터 끝까지 ‘미지의 서울’은 박보영에게 결코 호락호락한 작품은 아니었다. ‘일용직 근로자’로 꿈도 계획도 없이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지만, 여전히 삶에 눈을 반짝이는 쌍둥이 동생 ‘미지’와 초등학교 때부터 취업까지 엘리트의 길을 걷다가 공기업에 취업한 완벽주의자 쌍둥이 언니 ‘미래’까지. 외모 빼고 모든 것이 너무 다른 일란성 쌍둥이 자매를 1인2역으로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심지어 ‘인생 체인지’ 이후 미래인 척하는 미지, 미지인 척하는 미래까지, 극이 전개되는 내내 사실상 ‘1인 4역’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박보영의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쌍둥이가 서로의 인생을 바꾸었다’는 다소 판타지스러울 수 있는 설정은 박보영의 연기로 설득력을 얻었고, 덕분에 불편함 없이 극에 몰입한 시청자들은 저마다 ‘박보영이 연기대상을 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내놓고 있다.
“‘미지의 서울’을 하면서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정말 행복하다. 아쉬움이 남기보다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작품”이라고 종영소감을 전한 박보영은 작품이 사랑을 받을 거라고 예상했느냐는 질문에 “너무”라고 답했다.
“드라마에 대한 자신은 너무 있었어요. 제가 처음 미지와 미래를 너무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대본이 너무 좋았었거든요. ‘이 작품은 나만 잘하면 된다’ ‘나만 잘하면’ 좋은 드라마로 남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죠. 거기에 매주 작가님께서 써주신 대본도 좋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대본을 영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안 좋을 수 없었죠. 모두의 ‘노력의 결과’가 풍부하게 나온 거 같아서, 본방을 볼 때마다 행복함과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어요.”
‘날고 기는’ 박보영도 1인 2역에 도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1인 2역’을 놓고 많이 고민했었다고 말한 박보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대역이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키와 각도가 달라지고, 그로 인해 눈높이가 맞지 않아 NG가 발생했던 만큼 ‘철저한 계산’을 거친 연기가 필요했다는 것이 박보영의 설명이었다.
“제가 그동안 연기를 계산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동안 상대가 해주는 연기에 따라 연기를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상대도 저’이다 보니 눈높이의 위치와 움직임의 정도, 속도 등 연기의 합 등을 미리 계산하지 않으면 각자의 연기를 맞추는 것이 어렵더라고요. 모든 것이 처음 경험해 본 것들이었어요. 어려웠지만 그만큼 연기에 있어서 더 많이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생각해요.”
미지와 미래 중 박보영이 연기하기 편했던, 실제 배우와 본인과 더 가까웠던 캐릭터에 대해 묻자, 박보영은 “사실 편한 건 없었는데, 그나마 좀 더 편한 마음에서 연기했던 건 미지”라고 답했다.
“미지의 경우 제가 겉으로 표현해도 되는 감정이 있기도 하고, 지금까지 제가 보여주었던 밝은 캐릭터의 연장선이기도 해서 상대적으로 연기하기에 조금 더 수월한 부분은 있었죠. 미래의 경우 인물의 특성상 절제를 많이 해야 해서 연기하기가 조금 더 어려웠던 것 같아요. 표정도 많이 쓰지 않고, 톤이나 말투 등도 많이 누르고 절제해야 해서, 한 번 더 생각하고 연기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어요. 미지와 미래 중 누구와 가깝냐고요? 둘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사회생활 할 때는 미지에 가까운 거 같은데, 또 미래의 모습이 있기도 하거든요. 퍼센테이지를 따지면 미지가 ‘60’이고 미래가 ‘40’정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지’와 ‘미래’를 동시에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 박보영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적인 1인 4역 연기였다’는 극찬을 받을 정도로 충실히 소화해 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극찬 뒤에는 박보영의 치밀한 디테일이 있었다.
“첫 미팅 때부터 감독님께서 제게 처음 원하셨던 것은 ‘1인 2역을 한다고 해서 너무 다른 사람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였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 ‘저 미지에요’ ‘저 미래에요’가 보이도록 너무 다르게 하지 말자고 하시더라고요. 심지어 감독님께서 ‘두 사람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라고 하시면서, 톤을 다르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이를 두고 또 고민이 많았어요. 목소리의 폭을 많이 두지 않은 상태서 미지와 미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했죠. 그래서 접근했던 것이 비주얼 적 차이였어요. ‘우리끼리’ 알아보는 디테일을 잡아보자 했죠. 미지는 머리를 묶을 때 꽁지머리가 나오게 하고, 미래는 없이 하고. 미래는 화 할 때도 점막을 채워서 조금 더 또렷해 보이고자 했다면, 미지는 평소 화장을 잘 안 하잖아요. 미래가 됐을 때 화장이 서툴다 보니 꼬리만 살짝 빼는 정도로만 했어요. 사람들이 알아봤을지 모르겠는데, 제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어요.(웃음)”
“미래는 굳이 미지인 척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 박보영은 “미래는 미지와 달리 상대적으로 ‘미지인 척’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미지는 워낙 성격도 그렇고, 누군가를 장난으로도 잘 따라 하는 친구이니 미래를 잘 따라할 수 있었던 반면, 미래는 마음이 닿친 상태이기도 했고, 미지만큼 에너지가 안 나오는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미래가 제일 많이 부딪치는 사람이 세진인데, 세진은 진짜 미지와 만나지 않은 상태였잖아요. 그래서 굳이 미지인 척을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죠. 그래서 오히려 미래가 미지인 척하는 것이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미지의 서울’을 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게 되는 부분이 많았다고 말한 박보영은 “배우로서 연기해 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하루에도 여러번 미지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지만, 이를 통해 어느 정도 한 단계 올라서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저는 어떤 작품이든, 주어진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편인데, 이번에 하면서 ‘두 배’로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많았죠. 그래도 나름 매번 ‘했던 것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남 다른 걸 보니 조금은 얼떨떨한 느낌이 있기는 해요.”
미지와 미래, 쌍둥이 자매를 연기하면서 많은 울림을 주었던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엄마 옥희와의 관계였다. 다른 사람들이 미지와 미래의 ‘인생 체인지’를 눈치채는 와중에도 이를 늦게 알아차리는 엄마를 연기한 장영남과 박보영은 영화 ‘늑대소년’ 이후 13년 만에 재회다. “저도 선배님도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다시 모녀로 만나니 서로가 너무 편했다”고 연기 호흡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실 미지와 미래가 서로의 인생 체인지를 들키는 순간이 참 많았는데, 엄마만 늦게 알아렸잖아요. 현장에서 장영남 선배님도 ‘감독님 저 괜찮은거죠? 저 몰라도 되는 거죠?’라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기도 했어요. (웃음) 장영남 선배님과 두 번째 모녀로 만나게 됐는데, ‘늑대소년’ 때는 제가 많이 아팠었잖아요. 그때는 조심스러운 모녀 사이였다면, 이번에는 정말 현실적인 모녀로 만나서, 투덕거리는 것이 많았는데, 연기를 할 때 그렇게 신나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오히려 연기가 너무 잘 돼서 감정을 눌러야 할 때가 많았던 경험을 할 정도였다니까요. 여기서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차오르고, 짜증을 덜 냈어야 했는데 너무 엄마처럼 생각해서 짜증을 냈나 싶을 정도로 연기를 했었던 거 같아요.”
엄마와 다투는 장면을 통해 실제 엄마와 싸웠던 때가 떠오르기도 했다고 말한 박보영은 성인이 된 이후 겪게 된 사춘기로 ‘가출’을 감행했던 에피소드에 대해 들려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는 사춘기 없이 부모님 말씀을 진짜 잘 들었는데, 스무 살이 되고 사춘기가 딱 온 거에요. 그때 엄마랑 싸우고 반항심에 집을 나갔었어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부모님께 아니라고 말한 적도 없고, 거역한 적이 없었는데, 서울에 올라오고 일을 하면서 예민했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때 저도 모르게 ‘엄마가 나를 이해 못 해준다’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엄마 나 일하는 사람이야!’라고 엄청나게 싸운 다음에 집을 나갔었죠. 그때 바다를 보러 갔었어요. 그때 가장 빨리 출발할 수 있는 기차표가 강릉이어서 강릉에 갔었어요. 드라마에서 미지가 엄마한테 이야기했던 것 중 하나가 ‘엄마는 혼자 있잖아. 몰라 무슨 좋은 사이라고’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때 연기하면서 엄마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왜냐하면 그때 가출하고 바다를 보는데, 감정 정리는 30분이면 끝나더라고요. 엄마에게 막 뭐라고 했던 게 신경 쓰이고 ‘그래도 내가 잘못했지’ 싶더라고요. 그래도 나왔으니 바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있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한 4일 버틴 거 같아요. 그러다가 아빠가 ‘없었던 걸로 해줄 테니 엄마랑 빨리 사과하라’고 해서 못 이긴 척 들어갔었어요. 그때가 제 인생 제일 큰 반항이자 마지막 반항이었죠.”
‘미지의 서울’을 연기하면서 가족 생각을 많이 했다고 밝힌 박보영은 드라마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에 “저희 아빠가 제 걸 보면서도 가끔 주무시는데 ‘미지의 서울’은 잠깐도 졸지 않으시고 집중해서 잘 보셨다고 하시더라”고 말했다.
“저희 아빠도 이렇게 잘 보신다면 어르신들도 잘 보시겠구나 했어요. 언니와 동생, 형부들도 너무 재밌게 봤다고 해줬어요. 다들 드라마를 보면서 ‘이 부분 너무 좋고 너무 눈물난다’는 이야기를 세세하게 말해주는 편이다 보니, 방송하는 동인 가족 방이 매일 시끄러웠죠. 하하.”
유독 결핍이나 혹은 핸디캡이 있는 인물들이 많이 나왔던 ‘미지의 서울’은 서로 인생을 바꿔 살아보며 ‘내 자리에서 보이던 것만이 다가 아님’을 깨닫는 쌍둥이 자매를 통해 다른 이의 삶을 이해할 뿐 아니라, 나의 삶도 너그럽게 다독일 수 있는 따뜻한 연민을 전해주며 시청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드라마의 기획 의도가 시각적으로 잘 보였으면 좋겠다고 밝힌 박보영은 “서로의 인생이 편해 보였는데, 막상 겪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은 미지와 미래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 건 많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를 전하고자 했던 것 같다”며 말을 이어갔다.
“‘미지의 서울’은 지금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별로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가 노력하고 있고, 그게 잘되지 않았을지라도 열심히 살면 괜찮다고 말해주는 그런 드라마에요. 제가 한동안 누군가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는 작품을 많이 했었는데, ‘미지의 서울’도 그 연장선상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이런 드라마, 만나기 쉽지 않아요. (웃음)”
‘뽀블리’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귀엽고 밝은 캐릭터를 주로 소화해 왔던 만큼 지난 몇 년간 박보영의 고민 중 하나는 특정된 이미지 깨기였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부터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디즈니+ ‘조명가게’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한동안 어두운 면모가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자 노력했었다고 말한 박보영은 “한동안 제가 했던 캐릭터가 마냥 밝지만도 않았다. 기존 고정된 이미지에서 깨고 싶은 갈증에서 벗어나고 싶어 선택했었는데, ‘미지의 서울’ 또한 같은 맥락으로 선택했었다”고 털어놓았다.
“미지의 경우 겉으로는 밝아 보이지만, 사실 마음 상처가 있었던 친구고 미래는 처음부터 힘들고 지쳐있는 친구였기에, 제 바운더리 안에서 최대한 낮은 텐션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런 역할들을 계속 하다 보니, 제 나름대로 갈증을 채웠다 싶은가 봐요. 오히려 요즘은 밝은 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들더라고요. 제 기본 텐션이 떨어진 거 같기도 하고…그리고 ‘내가 뭐라고 메시지를 주려고 할까’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하하. 한동안 많은 분들께 메시지를 많이 드린 거 같아서 이제 가볍게 볼 수 있는 걸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다음 작품을 하게 된다면 꼭 밝은 걸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금빛나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