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감췄다고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손예진이 연기했던 조씨부인이 그러했다. 조선시대 정숙한 사대부 여인의 얼굴 뒤에 펼치지 못한 재능과 억눌린 욕망을 품고 살아가는 조씨부인으로 변신한 손예진은 이면에 있는 복잡한 내면을 단순히 사랑이나 질투로 규정하지 않았다.
“조씨부인이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며 넷플릭스 ‘스캔들’의 출연을 결심했다는 손예진은 인물을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행동의 이유를 끊임없이 곱씹으며 자신만의 ‘조씨부인’을 만들어 나갔다.
1782년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2003년 개봉한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으로 국내 관객들을 만난 후, 2026년 넷플릭스의 색을 입어 시리즈로 리메이크 돼 다시 세상에 나왔다. 조선시대 여성으로만 갇혀 살기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인 조씨부인(손예진 분)과 조선 최고의 연애꾼 조원(지창욱 분)이 벌이는 사랑 내기와, 그 내기에 얽힌 한 여인 희연(나나 분)의 이야기를 다뤘던 영화의 틀은 지키되, 시리즈로 다시 만든 만큼 내용은 원작을 따라간다.
2003년 개봉 당시 많은 큰 받았던 영화였던 만큼, 리메이크작에 출연한다는 것은 많은 기대를 받음과 동시에, 기존에 만들어진 이미지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부담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특히 이미숙이 만든 조씨부인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 머릿속에 남아있는 만큼, 손예진
“왜 조씨부인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처음 ‘스캔들’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씨부인을 재해석해 보고 싶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제약이 많은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욕망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뛰어난 재능이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했어요. 영화보다 시리즈가 아무래도 이야기를 만들어 갈 시간이 있으니 캐릭터를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봤고요. 어릴 때 영화를 재미있게 봤고, 소재도 흥미로웠어요. 인간의 심리에 명확한 정답이 없다는 점이 대중적으로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수 있지만, 배우로서는 매력적이었죠. ‘이 인물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할까’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연기했어요. 감히 정답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캐릭터예요. 어려운 만큼 매력적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손예진의 사극 장르 출연은 2002년 드라마 ‘대망’ 이후 약 25년 만이다. “아주 오래전에 사극을 했는데, 의상과 헤어 때문에 힘들었다”며 한동안 사극과 거리를 두었던 그는 “당시 외적인 부분이 힘드니 연기에도 집중하기 어려웠다”며 말을 이어갔다.
“당시에는 실제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체를 썼는데, 두통도 심하고 괴로워서 그 뒤로 사극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놓치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멋있는 사극을 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서 도전했죠. 과거 사극 촬영의 어려움은 해결됐냐고요? 다행히 조선시대 양반들은 가체를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고증을 따라가기로 했고,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고증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그래도 한복은 여전히 쉽지 않았어요. 아름다운 대신 답답하고 불편한 부분이 있었어요. 특히 여름에 촬영했는데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어요. 겹겹이 입어야 하니까요. 겉옷을 벗고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어도 벗을 수 없으니, 그게 곤욕이었죠. (웃음)”
손예진은 ‘조씨부인’에 대해 “겉으로는 정숙하고 삶에 여유가 있는 부인이지만, 안채에 갇혀 있는 인물”이라고 정의하면서, 벗어날 수 없는 사각의 기와집 안에 있는 모습이 그 인물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제가 내린 결론은,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 욕망을 감추고 있을 뿐 그 욕망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조씨부인은 자신의 재능을 펼치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사대부가의 부인으로 살아가는 현실과 타협했어요.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젊은 인물을 만나면서 지켜 왔던 것들이 흔들리고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아요. 그 욕망이 뒤틀린 욕망이 된 거죠. 한 인간으로서는 불쌍하고 안쓰러웠어요. 그렇다고 시청자들이 조씨부인에게 연민을 느끼거나 그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연기하지는 않았어요. 그 뒤틀린 욕망이 어떻게 분출되는지를 고민했죠.”
손예진은 지창욱과의 연기 호흡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와의 작업이 재밌었다고 말한 손예진은 농밀하고 응축된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 힘들기는 했어도, 감정을 유지한 채 심리전을 이어 가는 것이 좋았다고 웃었다.
“조원을 향한 조씨부인의 감정에 대해 정말 많이 고민했었어요. 그저 단순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조씨부인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잖아요. 사회를 읽는 눈조차 뛰어났지만, 여성으로 태어나 자신의 글을 펼칠 기회가 없었어요. 조원은 유일한 친구이자 사촌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였죠. 연정을 품기도 했겠지만, 진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자, 경쟁심도 있었을 것 같아요. 벗어나지 못한 채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온 감정이 무엇이었을지 고민했어요. ‘진짜 사랑한다면 저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고요. 조씨부인의 사랑은 ‘미저리’ 같은 사랑이었을까 싶기도 했어요. 지창욱과의 연기는 제가 한마디를 던지면 상대가 또 다른 대사를 던지고, 묘한 심리전이 계속됐기 때문에 긴장감이 굉장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조원을 향한 조씨부인의 감정은 ‘나를 유일하게 아는 너는 내 뜻대로 움직였으면 좋겠어’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한 손예진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조원이 조씨부인을 미치게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저는 그게 진짜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애증과 욕망, 질투와 연정이 모두 쌓인 복합적인 감정이지 않았을까요? 조씨부인에게 조원은 자신이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었던 것 같아요.”
손예진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대중의 호불호는 크게 갈렸다. 이에 대해 그는 “처음부터 완전히 대중적일 수는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며 의연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스캔들’은 편집이나 이야기 전개가 빠르기보다는 여백의 미가 많은 작품이잖아요. 조씨부인과 조원을 따라가면서 모두가 응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분이 공감할 수는 없는 지점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씨부인도 마찬가지였죠. 다만 인간은 단순하지 않잖아요. 생각해보면 저는 이렇게 복잡한 인물을 많이 연기해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연기를 하면서 ‘이 인물은 무슨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할까’ ‘조씨부인은 어떤 감정이었을까’를 계속 곱씹었어요.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느끼셨으면 해요. 많은 분들이 호평해 주시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러기는 쉽지 않잖아요. 어떤 분은 재미없게 보실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재미있게 보실 수도 있어요. 그건 오롯이 보시는 분들의 몫이에요. 저희는 대본에 충실하면서 어떻게 하면 작품을 멋지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에요. 그에 대한 평가는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도 오랫동안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고백한 손예진은 끊임없이 연기한다. 꾸준히 작품활동을 이어가는 원동력에 대해 “저는 계속 성장하고 싶다. 실망을 드리는 순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계속 노력하고 나아지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고 전했다.
“예전에는 ‘나는 이런 배우가 돼야지’, ‘다음에는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지’라는 생각이 구체적으로 있었어요. 어떤 작품을 통해 꼭 액션을 해보고 싶다는 식의 세부적인 목표도 있었고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예전에는 결과에 연연했던 것 같아요. 작품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도 컸고, 책임감도 무거웠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작품이 잘됐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마음이 나뉘면 조금 힘들더라고요. 좋은 결과를 얻는 작품도 있고, 예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오는 작품도 있잖아요. 지금은 언제까지 연기할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미친 듯이 달려왔다면 이제는 경험을 축적하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쌓아서 그 에너지를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는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배역, 어렵지만 도전하고 싶은 배역을 찬찬히 보려고 해요.”
‘조씨부인’을 통해 새로운 챕터의 시작을 알린 손예진의 다음 행보는 넷플릭스 ‘버라이어티’다. ‘버라이어티’에서 보여줄 손예진의 새로운 얼굴은 무엇일까?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않았던 얼굴을 보여드려서 놀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웃음)”
[금빛나 MK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