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의 이색 커버 영상 하나가 대한민국 대중음악계의 세대 지형도까지 뒤흔들고 있다.
걸그룹 리센느(RESCENE)의 멤버 원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이하 ‘안원잘부’)에 지난 9월 18일 추석 특집으로 공개된 ‘제나의 트로트 메들리’ 영상이 10월 1일 오전 기준 조회수 1430만 회에 육박하며 파죽지세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통상 명절 특집 콘텐츠는 연휴가 끝나면 화제성이 급격히 휘발되기 마련이지만, 이 영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유입 속도가 가팔라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공개 6일 만에 870만 뷰를 찍은 해당 영상은 11일 만에 1350만 뷰를 넘어서더니, 단숨에 채널 내 100여 개 영상을 모두 제치고 역대 조회수 2위로 올라섰다. 댓글만 7만 개 가까이 쏟아지며 전국에 ‘거제 야호’ 열풍을 몰고 왔던 채널 최고 인기작 ‘갸루와 거제에 왔습니다’(1488만 뷰)의 기록마저 턱밑까지 추격한 상태다.
이 같은 폭발적인 화력에 힘입어 리센느는 한국기업평판연구소가 10월 1일 발표한 신인 아이돌그룹 브랜드평판에서 당당히 1위를 거머쥐었다. 주요 키워드로 ‘러브어택’, ‘대학축제’와 함께 ‘트로트’가 나란히 꼽혔다는 점은 이번 현상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님을 방증한다.
‘메인댄서’의 반전 라이브
대중문화 콘텐츠가 시청자의 호감을 얻고 폭발적인 확산으로 이어지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조건은 연출되지 않은 ‘솔직함’과 뮤지션으로서의 ‘진정성’이다.
과거 립싱크 관행을 깨고 전 출연진이 생라이브를 선언하며 음악 프로그램의 르네상스를 열었듯, 오늘날 대중은 가공된 완벽함보다 아티스트의 날것 그대로의 실력에 열광한다. 제나의 트로트 메들리가 대중의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첫 번째 이유 역시 타협 없는 ‘본업 역량’에 있다.
놀랍게도 2008년생으로 팀 내 막내인 제나는 리센느의 메인보컬이 아닌 ‘메인댄서’ 포지션이다. 배우 고윤정을 닮은 화려한 비주얼로 ‘경주 고윤정’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가 레트로풍 의상을 입고 마이크를 잡았을 때만 해도, 대중은 아이돌의 귀여운 예능용 장기자랑 정도를 예상했다. 심지어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썸네일과 첫 소절을 듣고 AI 음성 합성 커버 채널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첫 곡으로 1975년 발표된 고봉산의 정통 트로트 ‘용두산 엘레지’가 울려 퍼지는 순간 분위기는 반전됐다. 트로트 가수 남승민조차 “경연에서 필살기로 쓰이는 극악의 난이도 곡인데, 아이돌과 전혀 다른 트로트 특유의 비브라토를 세밀하게 컨트롤해 냈다”며 “콘텐츠용으로 급조해 연습한 척이 아니라 옛날부터 트로트를 깊이 듣고 불러온 진또배기 실력”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평소 라이브 방송에서도 수시로 트로트를 흥얼거리던 제나의 오랜 애정과 탄탄한 기본기가 만개한 것이다. 이는 ‘거제 야호’라는 유행어와 밈(Meme)으로 뜬 그룹이라는 일각의 시선을 실력 하나로 잠재운 결정적 한 방이 됐다.
‘익숙한 새로움’의 마법… 박상철·장윤정·박지현까지 이어진 쌍방향 역주행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소구력은 급진적인 생소함이 아니라, 새로움과 낯익음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익숙한 새로움’에서 탄생한다.
트로트라는 장르는 MZ세대에게는 신선한 놀이 문화(새로움)로, 중장년층에게는 편안한 향수(낯익음)로 작동하며 불확실성을 줄이고 대중적 접점을 넓히는 최적의 매개체다. 제나는 고봉산의 ‘용두산 엘레지’부터, 박상철의 ‘빵빵’,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박지현의 ‘녹아버려요’, 장윤정의 ‘어머나’와 ‘초혼’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선곡표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했다.
가장 극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킨 곡은 2010년 발표된 박상철의 ‘빵빵’이다. 제나가 고작 3살이던 시절에 나온 이 곡은 원곡자 박상철의 걸쭉하고 구수한 허스키 보이스가 트레이드마크였다. 반면 제나는 기교를 과하게 부리지 않는 담백하고 청량한 음색에 정교한 딕션, 아이돌 특유의 쫀득한 리듬감을 입혀 상큼하고 발랄한 ‘2026년판 빵빵’을 완성했다.
결과는 가요계 전체의 연쇄 역주행으로 이어졌다. 제나의 ‘빵빵’ 편집 클립이 단독으로 124만 뷰를 돌파한 것은 물론, 원곡을 찾아 듣는 2030 세대가 급증하며 박상철의 ‘빵빵’은 멜론 성인가요 차트 34위로 진입하더니 한때 임영웅의 ‘이제 나만 믿어요’, 장윤정의 ‘초혼’에 이어 차트 3위까지 치솟는 기염을 토했다.
또한 과거 TV조선 ‘사랑의 콜센타’에서 임영웅, 영탁, 이찬원 등이 불렀던 ‘빵빵’ 무대 영상이 동반 역주행하고 있으며, 여수MBC와 안동MBC 등 지역 방송사 유튜브 채널들은 10년 전 박상철과 오승근, 장윤정의 무대부터 최근 화제를 모은 박지현의 ‘녹아버려요’ 원곡 영상에 이르기까지 일제히 ‘#리센느’, ‘#제나’ 해시태그를 내걸고 트로트 팬들과 K팝 팬들을 동시에 불러모으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선후배 가수가 만들어낸 유쾌한 ‘음악적 대화’다. ‘트로트 퀸’ 장윤정은 영상에 직접 찾아와 “보약 같은 친구구만! 자네 트로트 할 생각 있나?”라는 댓글로 극찬을 남긴 데 이어, 골프 연습장에서 리센느의 대표곡 ‘러브 어택(LOVE ATTACK)’ 안무를 직접 연습해 추는 화답 영상을 올리며 “47살 공격을 받아라”라는 센스 넘치는 메시지를 전했다.
대한가수협회장을 맡고 있는 박상철 또한 “가수의 노래가 진정한 힘을 얻는 것은 듣는 이들의 마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며 후배의 꿈을 따뜻하게 응원했다. 후배는 선배의 명곡에 새 숨결을 불어넣고, 선배는 후배의 트렌디한 문화를 흔쾌히 끌어안는 아름다운 선순환이 완성된 셈이다.
11월 컴백이 더 기대되는 이유
이번 신드롬의 이면에는 리센느라는 팀이 구축해 온 독보적인 콘텐츠 문법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대중은 작위적인 신비주의보다 긴장감을 깨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만만함’의 매력, 그리고 본캐릭터의 틀을 깨는 과감한 ‘부캐(부캐릭터)’ 서사에 깊이 몰입한다.
리센느는 그동안 사투리 콘셉트, 갸루 캐릭터, 10년 후 미래 콩트, 애니메이션 ‘패트와 매트’ 패러디까지 아이돌의 정형화된 틀을 부수는 기상천외한 시도로 ‘여자판 무한도전’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이번 트로트 메들리에서도 막내 제나가 진지하게 열창하는 뒤편에서 언니들인 원이, 리브, 미나미, 메이가 하늘색 원피스를 맞춰 입고 능청스럽게 코러스와 백댄서를 자처한 장면은 콘텐츠에 완벽한 예능적 리듬감을 부여했다. 특정 인기 멤버 한 명에게 기대는 대신, 매 기획마다 각기 다른 멤버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팀 전체의 서사를 키우는 영리한 전략이 다시 한번 적중한 것이다.
결국 재미로 유입된 대중은 리센느의 본업인 음악에 완벽히 안착했다. 2024년 8월 발매된 ‘러브 어택’이 약 2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쓰며 멜론 TOP100 장기 1위와 음악방송 2관왕을 달성했고, ‘데자부(Deja Vu)’, ‘런어웨이(Runaway)’, ‘프리티 걸(Pretty Girl)’ 등 기존 발표곡들이 줄줄이 차트에 재진입했다.
오는 11월 3일 미니 4집 ‘펄스(PULSE)’로 컴백을 앞둔 리센느의 행보에 가요계 안팎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MZ세대의 숏폼 알고리즘을 장악한 데 이어 트로트 팬덤과 중장년층의 호감까지 흡수하며 전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적 인지도와 탄탄한 지지 기반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유쾌한 파격 속에 진정성 있는 실력을 담아낼 줄 아는 다섯 소녀가 새 앨범 ‘펄스’를 통해 또 어떤 가슴 뛰는 파동을 일으킬지, 리센느의 진짜 전성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