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애환 서린 소프트테니스 잔치, 올해 100번째 대회 [이종세 칼럼]

지난 1세기 민족의 애환 서린 소프트테니스 잔치
제100회 전국대회 6일부터 문경에서 열흘간 열전
1923년 창설…단일 체육행사로는 국내 最古 역사
남녀 100여 팀 1000여 명 참가해 지역 상권 흥청
운동 부족한 조선 여성 체력향상 위해 출범 ‘근본으로 올라가서 생각하면 운동의 권장은 먼저 여자로부터 시작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그러나 여자 쪽에는 별로 생각이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방안에만 있는 시간이 많아 운동이 극히 부족한 조선 여자의 체질은 다른 나라 사람보다 매우 허약하므로 여자의 운동을 권장함이 긴박함을 통절히 깨달은 본사는 이에 대한 사업을 개척하여 여자의 운동 권장을 시작하고자 우선 관 사립 여학교의 정구대회를 대대적으로 열기로 했다.’

동아일보에 1923년 6월 실린 제1회 전조선 여자정구대회 개막경기 모습. 볼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2만여 관중이 몰려 운동장 주위는 물론 주변 언덕 등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사진=동아일보 제공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사가 3년여 뒤인 1923년 6월 14일 자 3면에 제1회 조선여자정구대회 창설을 알리는 기사를 ‘조선여자정구대회 / 동아일보사 주최로 이달 말 경성에서’라는 제목 등과 함께 실었다. 동아일보사 주최로 6일 경북 문경 국제소프트테니스장에서 개막해 15일까지 10일간 열리는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는 올해로 창설 100회를 맞았다. 특정 언론사가 개최하는 체육행사를 굳이 소환한 것은 이 대회가 단일종목으로선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와 전통을 지녀 귀중한 문화유산의 맥을 잇는 큰 뜻이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테니스의 발상지인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천황사배(天皇賜盃‧덴노시하이)보다 23년이나 앞서있다. 이 대회는 또 여성만이 참가한 국내 최초의 스포츠 이벤트로서 1920년대 당시 ‘여자는 집안에만 있는 것이 미덕’이라는 통념을 깨고 여성의 사회참여를 도모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역사적 의미도 안고 있다. 소프트테니스는 그동안 ‘연식(軟式)정구’로 불려왔는데 2019년부터 공식 명칭이 ‘소프트테니스’로 바뀌어 대회 이름도 ‘전국정구대회’에서 ‘전국소프트테니스대회’로 변경됐다

아녀자 외출 금지 시절…‘상식 파괴’ 행보
제1회 대회는 당시 각계의 거센 반론에 부닥치기도 했다. 이 무렵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 대회의 창설은 당시의 관념이나 상궤(常軌)를 뛰어넘는 ‘파격’ 바로 그 자체였다. 비록 개화기였다고는 하나 ‘남녀 7세 부동석’의 유교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었고 아녀자의 외출을 금기시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동아일보사 주역들의 미래를 내다보는 선구자적 혜안이 끌어낸 하나의 ‘상식 파괴’였던 것이다. 원년대회는 서울 정동의 경기제일고녀(경기여고 전신) 코트에서 열렸다. 요즘의 여고 선수들은 코트에 미니스커트나 핫팬츠 차림으로 나와 젊고 발랄한 건강미와 역동미를 한껏 뽐내고 있지만 그 무렵에는 치렁치렁 땋아 내린 머리에 띠를 동여매고 무명 치마에 흰 양말을 신은 고전적인 모습이었다. 대회장에는 학부모와 임원 외의 남자는 출입할 수 없었고 갓 쓰고 도포를 입은 어른들은 딸의 경기를 응원하기보다는 감시하는데 급급한 형편이었다. 관중 출입을 부녀자만으로 제한하자 일부 짓궂은 청년들은 경기장 담벼락 밖의 높은 나무에 올라앉아 경기를 훔쳐보는 웃지 못할 촌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시중 관심 폭발…2만 관중 몰려 경기 훔쳐보기도 남자 관중의 출입을 제한했어도 시중의 관심은 온통 이 대회에 쏠려 무려 2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4000여 명 수용에 불과한 경기제일고녀 운동장만으로는 도저히 경기 진행이 불가능해 부근 불교중앙포교당과 보성초등학교의 양해를 얻어 주변 언덕으로 관중을 안내하는 광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8개팀이 참가한 원년대회의 우승팀은 서울 진명고녀. 진명고녀는 조선체육회가 기증한 은제 우승컵의 초대 주인공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조선여자정구대회는 해를 거듭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뛰어난 선수를 잇달아 배출, 경기 수준 역시 향상되었다. 매년 각 학교 코트를 빌려 전전하던 대회도 동대문의 서울운동장에 연식정구 전용 코트가 마련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고 참가 학교도 20여 개로 늘었다. 1935년 제13회 대회에 이르기까지 조선여자정구대회는 해마다 번창했다.

일제 압박과 6.25 전쟁 등으로 대회 중단 그러나 1936년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이해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됨에 따라 이 대회도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가 복간된 이후 1938년(16회)과 1939년(17회)에는 대회를 치렀으나 1940년 동아일보가 다시 폐간당하면서 또다시 중단의 비운을 맞아야 했다. 결국 일제 아래에서 스포츠를 통한 독립심 고취, 체력배양, 그리고 항일의 한 방편으로까지 인식되었던 이 대회는 우리 민족과 더불어 애환을 함께 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15 광복 후 동아일보가 복간되면서 1947년 다시 막 올린 이 대회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발전적 혁신을 도모했으나 1950년, 6.25 전쟁의 민족적 비극과 함께 또다시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1973년부터 국제대회…역대 아시안게임 금 25개 이 대회는 1954년 동아마라톤대회 등과 함께 부활, 중등부, 고등1-2부, 대학부, 일반부로 규모를 확대했다. 1965년 제43회 대회부터는 경식부(硬式部)를 신설, 제1회 전국여자테니스대회를 함께 열었고 1966년에는 아예 테니스 대회를 별도로 개최, 제44회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3년 제51회 대회부터는 국제대회의 면모를 갖추면서 일본과 대만 선수들이 참가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대회는 누가 뭐라 해도 소프트테니스 국가대표선수의 산실로서 우리나라 정구를 세계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다는 평가다. 특히 1994년 히로시마대회부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우리나라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까지 모두 25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이 기간 일본 대만 중국 등 3개국이 따낸 금메달은 모두 16개에 불과하다.

지난 2001년 한국 소프트테니스의 요람이었던 서울 효창구장이 서울시의 계획에 의해 헐리면서 경기도 안성으로 장소를 옮겼던 이 대회는 80회(2002년) 대회가 2002 부산아시안게임 리허설로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렸으나 81회 (2003년) 대회부터 84회(2006년) 대회까지는 안성에서 개최됐다.

2007년 남자부 신설…16년째 문경에서 개최 그리고 필자가 동아일보 스포츠사업팀장을 맡고 있던 2006년(제84회)부터는 대회명을 ‘동아일보기 전국정구대회’로 바꾸고 남자 선수들에도 문호를 개방하였다. 국내 소프트테니스계에서 “남성의 대회 참여를 제한하는 것은 또 다른 ‘성차별’이다”라는 지적이 제기돼 대회 창설 83년 만에 여자부와 똑같이 남자부를 신설했다. 이어 2007년 85회 대회부터 개최 장소를 문경으로 옮겨 올해까지 16년째 열리고 있있다. 매년 5월 초·중·고·대·일반부 120여 팀, 1000여 명이 참가, 지역 상권 활성화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오는 10일 오후 2시부터 열리는 남자단체 결승과 혼합복식 결승은 동아일보 자매 종편인 채널A가 2시간 동안 생중계할 예정이다.

이종세(용인대 객원교수‧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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