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20년간 품어온 이야기가 세상에 공개됐다. 박찬욱 감독의 시선으로 완성한, 필사의 생존극 ‘어쩔수가없다’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다 이루었다’고 느낄 만큼 삶이 만족스러웠던 회사원 ‘만수’(이병헌 분)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박찬욱 감독이 오랜 기간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어쩔수가없다’는 평범한 인물이 갑작스러운 해고라는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 가는지를 그만의 시선으로 그려냈다. 재취업을 위한 경쟁을 이어갈수록 극단적인 선택지에 직면하는 ‘만수’의 모습과, 그가 겪는 내적 갈등은 예측할 수 없는 전개 속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이병헌이 자기(만수)가 독신이었다면 어땠을까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동기에서 가장 큰 비율이 가족이다. 하지만 가족을 범행 동기로만 보는 건 일종의 대상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 한명 한명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후반의 그들의 시선에서 포착된 만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균형을 맞추려 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미국의 소설가 도널드 웨이트레이크의 소설 ‘액스’의 원작으로 한다. 특히 이 작품은 20년 가까이 박 감독이 영화화를 꿈꿔왔던 작품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결의 작품을 선보인 그는 가족과 집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하는 구직자 만수와 그 주변 인물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통해 필사의 생존극을 완성해냈다.
“사실 만수의 살인 동기를 관객이 납득가게 만드는 건 어렵지는 않다. 노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큰 수술이 필요하다거나, 곧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는데 아이들 밥을 못 먹이게 생겼다거나, 이런 여러 상황을 장치로 만들면 관객을 이해시킬 순 있다. 하지만 만수는 절박하게 보이게 행동하고, 그 행동의 실행과정에서는 어리숙하고 범죄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만수를 보면서 어떤 관객은 만수에게 과몰입할 수 있지만, 또 다른 관객은 저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끔 만들고 싶었다. 이런 상반된 두 마음이 나란히 평행선을 이루게 가게 하는 게 이 영화의 제일 중요한 목표였다.”
‘어쩔수가없다’는 만수의 필사적인 생존극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 안에서 위기에 맞서는 강인한 아내 ‘미리’, ‘만수’가 동경하는 잘나가는 제지 회사 반장 ‘선출’, ‘만수’와 경쟁하게 되는 구직자 ‘범모’와 ‘시조’, ‘범모’의 아내 ‘아라’ 등의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극의 풍성함을 더한다.
긴장과 이완을 오가는 드라마틱한 전개, 감각적인 미장센과 견고한 연출에 블랙 코미디까지 더해진 ‘어쩔수가없다’를 통해 박찬욱 감독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심어뒀다. 어떤 장면을 인상 깊게 봤냐에 따라 다른 색을 지닌 영화로 남을 수 있게 만들어 둔 것.
“영화에 대한 전체 인상은 사실 어떤 장면이 강하게 박혔느냐에 많이 좌우되는 것 같다. 만수가 아라(염혜란 분)에게 쫓기면서 뛰어 내려오는 와이드앵글에 담은 장면이 제일 인상적이었다면 가볍고 몸개그를 하는 그런 영화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며, 만수 미리 부부가 포옹하고 카운트다운을 하는 게 인상적이었다면 가족 드라마가 된다. 그저 가벼운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특히 투트랙으로 가게 된 목적에 대해서도 밝혔다. “모든 영화에서 항상 말하는 게 관객이 스스로 질문하는 영화, 질문을 제안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거다. 윤리적인 질문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래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그 거리를 얼마나 적절하게 유지하느냐다. 인물과 관객이 떨어졌다 붙었다가를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고 다가갔다가 물러섰다가를 반복하면서 감정적으로, 동시에 지성적으로 영화를 음미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도덕적으로는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얻어보려고 한다. 이건 저의 영화 인생 전체의 목표이기도 하다.”
2004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올드보이’, 2009년 심사위원상을 받은 ‘박쥐’, 2016년 경쟁 부문에 초청된 ‘아가씨’, 2022년 감독상을 받은 ‘헤어질 결심’까지, 금기를 넘나드는 서사와 치밀한 미장센이 돋보이는 명작들로 관객을 매혹시킨 ‘거장’으로 불리고 있는 박찬욱 감독은 ‘거장’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가 훌륭하겠다는 기대에 대한 부담은 없다. 하지만 ‘이 사람 영화는 이렇지’라는 고정관념에 대한 부담은 있다. 그게 제일 부담스럽고 언제나 떨쳐버리고 싶은 문제다. 사실 여러 번 말했지만 ‘도끼’ ‘모가지’ 같은 제목을 쓰고 싶었는데 못 쓴 이유도 있다. 그런 선입견 없이 신인 감독의 영화처럼 관객들이 봐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성적인 묘사나 노출, 변태 같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선입견에 대한 생각도 털어놨다. “‘잔인하다’ ‘뒤틀린’ ‘성적인 묘사’ ‘변태’ 등의 표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좋은 의미의 변태 같다는 건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늙은 변태 같다’로 보이는 건 최악인 거 같다.”
[손진아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