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故 안성기가 동료와 후배 영화인들의 깊은 애도 속에 마지막 길을 떠났다. 말보다 태도가 먼저였고, 눈물보다 침묵이 길었던 이별이었다.
지난 5일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된 빈소에는 이른 시간부터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박중훈, 조용필, 최수종, 송강호, 전도연 등 영화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정부는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고인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가장 먼저 빈소를 찾은 배우 박상원은 짧은 한마디만 남겼다. “하늘나라에서도 연기를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말은 짧았지만, 평생 배우로 살아온 안성기의 삶을 압축한 문장이었다. 박상원은 끝내 말을 잇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태진아는 고인을 “친형 같은 존재”라고 불렀다. 그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며 “돈 한 푼 받지 않고 후배들을 도와주던 분이었다. 사람 안성기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말끝마다 고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묻어났다.
가수 바다는 영결식이 열린 9일, 끝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성당에서 조용히 미사를 드리던 안성기의 모습, 늘 먼저 다가와 따뜻한 말을 건네던 선배의 얼굴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바다는 결혼을 축하하며 직접 국수를 말아주던 기억, 커피 한 잔에도 진심 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진정한 어른의 온정을 가까이에서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전했다.
9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엄수된 장례 미사와 영화인 영결식은 정우성의 침묵으로 시작됐다. 그는 고인의 영정을 품에 안은 채 말없이 행렬의 맨 앞에 섰다. 화려한 수식도, 과장된 감정도 없었다. 그 자리는 오롯이 ‘배운 사람의 태도’로 채워졌다.
정우성은 장례 기간 내내 빈소를 지켰다. 상주가 아니었지만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이정재는 정부가 추서한 금관문화훈장을 들었고, 설경구·박철민·유지태·박해일·조우진·주지훈 등 후배 배우들이 운구를 맡았다. 한 시대를 이끈 배우의 마지막 길을 또 다른 세대가 함께 메운 순간이었다.
영결식에서 정우성은 추도사에 앞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렵게 입을 연 그는 고인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후배를 대하듯 제 이름을 불러주셨다”고 말했다. 영화 ‘무사’ 촬영 당시 중국에서 약 다섯 달을 함께 지내며, 쉽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안성기가 늘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현장을 다독였다는 기억도 전했다.
그는 고인을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고,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려 했던 분”으로 기억했다. 타인을 향한 존중은 자연스러웠고, 자신에 대한 높임은 끝까지 경계했던 사람. 정우성은 “그 엄격함이 때로는 철인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1957년 아역으로 데뷔한 안성기는 약 70년에 걸쳐 한국 영화와 함께 걸어온 배우였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 ‘투캅스’, ‘실미도’, ‘라디오 스타’, ‘한산: 용의 출현’까지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얼굴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냈다. 아역에서 성인, 노년에 이르기까지 연기 인생 전 과정을 완주한 유일한 배우로 남았다.
정우성이 들었던 영정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배우가 평생 지켜온 태도와 품격, 그리고 한국 영화가 스스로에게 부여해온 책임의 무게였다. 5일 동안 그 곁을 지킨 시간은 애도의 형식이 아니라, 배움의 방식이었다.
영화인장으로 치러진 장례 절차는 영결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고인의 유해는 경기 양평 ‘별그리다’에 안치됐다.
박상원은 삼켰고, 바다는 울었으며, 정우성과 이정재는 끝내 자리를 지켰다. 안성기가 남긴 것은 작품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 책임지는 태도, 그리고 말보다 먼저 보였던 품격이었다. 한국 영화의 정신은 그렇게, 눈물 속에서 조용히 이어졌다.
[김승혜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