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에 스크린에 섰던 아버지가, 다섯 살 아들을 향해 남긴 한 통의 편지가 영결식장을 울렸다. ‘국민배우’ 故 안성기의 마지막 길에서 공개된 1993년의 손편지는 배우가 아닌 한 아버지의 얼굴로 남아, 깊은 여운을 남겼다.
9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엄수된 ‘국민배우’ 고(故) 안성기의 영결식 현장은 한 통의 편지로 깊은 침묵에 잠겼다. 스크린 속 배우가 아닌, 한 아버지로서 남긴 글이었다.
영결식 말미, 장남 안다빈 씨는 부친이 생전에 자신에게 써 준 편지를 꺼내 들었다. 1993년, 자신이 다섯 살이던 해 아버지가 남긴 손편지였다. 안다빈 씨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서재에서 오래된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며 “버리지 않고 간직해 오신 것을 이제야 읽게 됐다”고 전했다.
편지 속 안성기는 배우가 아닌 ‘아빠’였다. 그는 “다빈아, 이 세상에 네가 처음 태어나던 날 아빠를 꼭 빼어닮은 외모, 아빠 주먹보다 작은 네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눈물이 글썽거렸다”고 적었다. 이어 “벌써 이렇게 자라 의젓해진 모습을 보니 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다”며 아들을 향한 벅찬 마음을 고스란히 담았다.
편지는 애정에 그치지 않았다. 안성기는 아들이 어떤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지 조심스럽게 적어 내려갔다. 그는 “항상 겸손하고 정직하며 남을 사랑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며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시간을 지킬 줄 알며 실패와 슬픔을 평화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거라”고 당부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현장을 더욱 울렸다. 안성기는 “무엇보다 남자는 야망과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어려움 앞에서도 자신을 잃지 말고 끝까지 도전해 봐라”며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은 착한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라고 편지를 마무리했다.
편지를 읽던 안다빈 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이 글은 아버지가 저뿐 아니라 모두에게 남기고 간 메시지 같았다”고 말했다. 평생 남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했던 고인의 삶과, 30여 년 전 적힌 문장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고 안성기는 1957년 다섯 살의 나이로 영화 ‘황혼열차’에 출연하며 데뷔했다. 아역 배우로 시작해 성인, 노년에 이르기까지 약 70년간 한국 영화와 함께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고래사냥’, ‘투캅스’, ‘실미도’, ‘라디오 스타’, ‘한산: 용의 출현’ 등 시대의 얼굴을 담은 작품들은 그의 시간 그 자체였다.
2019년부터 혈액암 투병을 이어오면서도 그는 끝까지 영화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영화인장으로 치러진 장례는 이날 영결식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고인의 유해는 경기 양평 ‘별그리다’에 안치됐다.
다섯 살에 스크린에 섰던 아버지는, 다섯 살 아들을 향해 조용한 편지를 남겼다. 화려한 수식도, 거창한 말도 없었다. 다만 한 인간이 한 인간에게 남긴 가장 단정한 삶의 문장이었다.
[김승혜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