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효진, 정해인, 박은빈, 양세종. 이름만 들어도 안방극장을 쥐락펴락하는 쟁쟁한 주연 배우들의 이름표를 모조리 제치고 가장 꼭대기에 이름을 올린 여배우가 있다. 그것도 주연이 아닌 조연급 악역으로 말이다.
최근 굿데이터코퍼레이션이 발표한 8월 2주 차 TV-OTT 통합 드라마 출연자 화제성 부문에서 디즈니+ ‘킬러들의 쇼핑몰 시즌2’의 정윤하가 2.34%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이동욱과 나란히 공동 1위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불과 0.01% 차이로 3위 박은빈(2.33%)을 따돌렸고, 공효진(5위)과 정해인(7위)마저 가뿐히 뛰어넘었다.
단순히 반짝 화제성으로 치부하기엔 그가 걸어온 길과, 화면 안에서 뿜어낸 에너지가 너무도 무겁고 짙다.
‘감정 없는’ 사이코패스 대신 ‘통제하는’ 소시오패스
정윤하가 극 중 맡은 ‘쿠사나기’는 바빌론 동아시아 지부를 총괄하는 리더다. 그는 등장부터 흔한 악역의 공식을 비틀었다. 파워풀한 액션이나 고함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대신, 낮은 음성과 흔들림 없는 시선 처리로 공간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가 치밀하게 설계한 ‘3개 국어(한국어·영어·일본어)’ 연기는 압권이었다. 단순히 외국어를 유창하게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영어의 문어체, 일본어의 남성적 어투, 한국어의 비즈니스 톤 등 언어마다 캐릭터의 가면을 바꿔 끼며 섬뜩한 입체감을 부여했다. 억지로 호흡을 툭툭 끊어내는 독특한 대사 리듬과 의도적인 손짓은, 강박적으로 욕망을 통제하려 들지만 실은 그 욕망에 지배당하고 있는 소시오패스의 비틀린 내면을 소름 돋도록 정밀하게 묘사해 냈다.
지안(김혜준 분)과 삼촌 진만(이동욱 분)을 위협하며 판을 쥐락펴락하던 그의 서늘함은 후반부 폭주와 허탈한 최후를 맞이하며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잔상을 남겼다. 시즌1의 명성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예측 불가능한 불편함’을 무기로 삼아 장르물 내 여성 리더 빌런의 새로운 지표를 세운 것이다.
종양 수술의 아픔 딛고 써 내려간 11년 차의 ‘인간 승리’
기자의 시선에서 정윤하의 이번 1위 등극이 유독 반갑고 뭉클한 이유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그가 견뎌낸 인고의 시간 때문이다.
정윤하는 불과 2년 전인 2024년 5월, 종양 판정을 받고 수술대에 오르며 암 투병의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뼈아픈 시련을 겪었다. 다행히 악성 종양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건강을 회복했지만, 몸과 마음이 벼랑 끝에 몰렸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천만 영화 ‘파묘’에서 박지용(김재철 분)의 아내 역으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그는 ‘카지노’, ‘서울의 봄’, ‘트렁크’ 등 무수한 작품의 작은 롤을 거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벽돌처럼 단단하게 쌓아 올렸다. 그렇게 11년 동안 갈고닦은 치열한 연기 내공이 이번 ‘쿠사나기’라는 인생 캐릭터를 만나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 셈이다.
캐스팅 확정 후 불과 3주 만에 3개 국어 대본과 액션을 통째로 씹어 삼키며 완성한 정윤하의 ‘쿠사나기’. 이름값이나 소속사의 거대한 자본 없이, 오직 연기력 하나로 쟁쟁한 톱스타들을 꺾고 화제성 1위를 삼킨 이 조연 여배우의 서사는 2026년 하반기 방송가에서 가장 짜릿한 대반전이자 감동적인 인간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