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페르십 반둥(인도네시아)을 시작으로 조호르 다룰 탁짐(말레이시아), 프놈펜 크라운(캄보디아)이 ‘한국에서’ 연달아 승전고를 울렸다.
한 달 사이 한국 축구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프로구단에 안방을 내줬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프로구단 모두 최초의 한국 원정 승리란 역사를 썼다.
그들이 승리한 방식은 더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들은 90분 내내 수비만 하다가 한두 번의 역습으로 승리를 낚아챈 게 아니었다. 상대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파악한 뒤 ‘승리를 목적’으로 한국 원정에 나섰다는 게 경기장에서 드러났다.
상대는 전방에서부터 K리그1 구단들을 강하게 압박하며 전진을 방해했다. 중앙에서의 공격 전개를 차단하고 측면 크로스에 의존하는 단조로운 공격을 유도했다. 그들은 K리그1 구단들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고,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프놈펜을 6년째 이끌고 있는 올레흐 스타린스키(40·우크라이나) 감독이 강원 FC전을 하루 앞둔 10월 14일 전한 말은 곱씹을수록 인상적이다. 그는 강원의 전력뿐 아니라 K리그1의 순위 경쟁까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K리그1이 아주 치열하다는 걸 알고 있다. 리그 순위만 봐도 알 수 있다. K리그1 2위부터 9위까지 승점 차이가 7점밖에 나지 않는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강원은 그런 K리그1에서 3위에 올라 있다. 강원은 상위권 경쟁을 벌이면서 다음 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 진출을 노리는 것으로 안다. 우리는 K리그1의 수준과 강원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강원 분석도 마쳤다. 강원의 경기를 보고 또 봤다. 강원은 아주 빠른 축구를 구사한다. 선수들의 신체 능력과 기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적극적인 경합을 펼치면서 공을 상대 위험 지역까지 빠르게 운반한다. 강원의 축구는 보는 재미가 있다. 강원은 많은 득점 기회를 만들어 낸다. 실점은 많지 않다. 강원 선수들은 압박과 수비에도 적극적이다. 강원을 분석하면서 한국 축구가 왜 아시아의 강호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팀과 맞붙게 돼 영광이다.”
스타린스키 감독은 빈말로 상대를 치켜세운 게 아니었다.
프놈펜은 15일 강릉하이원아레나에서 열린 2026-27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투(ACL2) 조별리그 H조 2차전에서 강원을 2-1로 제압했다.
강원을 향한 존중은 분명했다. 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스타린스키 감독은 강원전에서 승리한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린 도전자였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최대한 많은 찬스를 만들려고 했다. 선수들에게 ‘우리가 준비한 걸 내보이자’는 메시지를 줬고, 선수들은 그라운드 위에서 우리가 준비한 걸 구현해 냈다. 승리하기 위해선 운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린 오늘의 결과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과정이 존재하는 승리다. 우리 선수들이 오늘 승리로 큰 자신감을 더했으면 한다.”
#. 상대는 외국인 선수가 주축이라는 익숙한 변명
AFC의 2026-27시즌 대회 규정에 따르면 ACLE와 ACL2에는 경기당 외국인 선수 출전 제한이 없다. 선발 11명을 외국인 선수로 구성해도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대회에 참가하는 선수 등록에는 별도의 기준이 있다.
대회에 참가하는 구단은 최대 35명을 등록할 수 있다. 리스트 A에는 최대 25명, 리스트 B에는 최대 10명을 등록할 수 있다. 리스트 A에는 자국에서 육성한 선수 6명을 포함해야 한다. 이 가운데 최소 3명은 해당 구단이 직접 육성한 선수여야 한다. 소속 국가 축구협회 산하의 다른 구단에서 육성한 선수는 최대 3명까지 인정받을 수 있다.
자국 육성 선수의 기준은 국적이 아닌 육성 이력이다. 15세부터 21세 사이에 해당 구단이나 같은 국가 축구협회 소속 구단에서 36개월 이상 등록된 이력이 있어야 한다.
자국 육성 선수 6명을 모두 채우지 못한다고 대회 참가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대신 그만큼 리스트 A에 등록할 수 있는 선수 수가 줄어든다.
경기당 출전 명단에는 최대 23명을 포함할 수 있다. 외국인 선수의 등록과 출전 인원에는 별도의 제한이 없다.
아시아클럽대항전에 나서는 여러 구단이 이러한 규정 아래 외국인 선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동아시아 지역에선 조호르와 부리람 유나이티드(태국) 등이 대표적이다. 서아시아의 알 아흘리나 알 힐랄, 알 나스르(이상 사우디아라비아) 등은 유럽 빅리그에서 활약한 슈퍼스타까지 영입해 활용한다.
조호르는 10월 13일 포항 스틸야드에서 열린 2026-27시즌 ACLE 리그 스테이지 2차전에서 포항 스틸러스를 2-0으로 제압했다.
조호르의 선발 출전 선수 11명 중 9명이 외국인이었다.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은 4명 가운데 3명도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선수의 기량과 경험이 조호르의 경쟁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왓퍼드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로 승격시키고 EPL에서도 지휘봉을 잡았던 조호르의 시스코 무뇨스(46·스페인) 감독은 포항전 승리 후 이런 말을 남겼다.
“말레이시아 축구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 특히 말레이시아의 어린 재능들이 좋은 외국인 선수들과 훈련하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20살인 다니쉬 아미루딘은 얼마 지나지 않아 ACLE에서 재능을 뽐낼 기대주다. 이런 선수들은 자국 리그와 컵 대회에서 꾸준히 경험을 쌓고 있다. 나는 조호르의 감독이다. 말레이시아 축구 발전도 중요하지만 팀의 발전을 우선한다. 분명한 건 우리의 아카데미 시스템은 굉장히 훌륭하며, 우린 아시아클럽대항전에서 일구는 성과를 통해 계속해서 발전 중이란 사실이다.”
조호르는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갖춘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한다. 동시에 유소년 육성에 힘을 기울이며 가능성 있는 말레이시아 선수들에게 성장의 기회를 제공한다. 아시아클럽대항전에서 외국인 선수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해서 자국 선수 육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공격수 아리프 아이만(24)이 대표적이다. 조호르 유소년 팀에서 성장한 아이만은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아이만은 올 시즌에도 조호르의 핵심으로 활약 중이다. ACLE 리그 스테이지 1차전 부리람전에서는 풀타임을 소화했고, 포항 원정에서는 86분을 뛰었다.
K리그1 구단들이 아시아클럽대항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건 아니다.
K리그1에선 우승 경쟁만큼이나 차기 시즌 아시아클럽대항전 출전권 확보에 사활을 건다.
아이러니한 건 리그에선 아시아클럽대항전 출전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정작 아시아클럽대항전이 시작되면 리그를 우선하는 선택이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구단마다 사정은 다르다. 치열한 순위 경쟁과 선수들의 체력 부담을 무시할 수 없다. 선수층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흐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강원이 15일 프놈펜에 1-2로 패한 뒤 정경호(46) 강원 감독에게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 물었다.
정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K리그1에는 파이널 A에 진입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 시즌이라는 인식이 있다. 파이널 A에 올라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까지 확보했다면 더 높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도 파이널 A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상당하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야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해외 구단들처럼 선수층이 두꺼워서 리그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나설 선수단을 이원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K리그 전체가 고민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말씀하신 대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경쟁하지만, 막상 진출한 다음 시즌에는 리그가 우선시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 나서는 구단들은 선수단의 질과 깊이를 더해야 한다. 더 높은 곳에 도전하려면 이런 부분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 감독의 발언에는 현장의 현실적인 고민이 담겨 있었다. 리그와 아시아클럽대항전에서 모두 성과를 내고 싶지만, 선수단의 질과 깊이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아시아클럽대항전에서 커지는 한국 ‘프로선수’에 대한 의구심
FC 서울은 2016년 이후 10년 만의 K리그1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르면 10월 18일 김천상무와의 홈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할 수 있다. 단, 17일 울산 HD가 부천 FC를 상대로 승리하지 못하고 서울이 김천을 꺾어야 한다.
서울은 올 시즌 ACL2에선 2전 2패를 기록 중이다. 9월 16일 홈에서 페르십 반둥에 0-1로 패했다. 10월 14일 멜버른 빅토리(호주) 원정에서는 0-3으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서울 김기동 감독은 대회 시작 전부터 리그 우승을 확정하기 전까지는 K리그1에 더 집중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10년 만의 리그 우승이 눈앞에 있는 상황이다. 서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하지만 ACL2 2경기에서 드러난 경기력과 결과까지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다.
서울은 올 시즌에도 적지 않은 선수들을 1군에 등록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 등록된 1군 선수만 36명이다. 이 가운데 올 시즌 K리그1에서 10경기 이상 뛴 선수는 17명에 불과하다.
ACL2 2경기에서는 리그에서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던 선수들이 주축을 이뤘다. 이 선수들은 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들과 상당한 기량 차이를 드러냈다.
여기서 확실히 해야 할 게 있다.
그들 역시 ‘프로축구 선수’라는 사실이다.
서울이 ACL2에 내세운 선수들은 단순히 경험을 쌓으러 나온 유소년 선수가 아니다. K리그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서울 1군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이다. 서울이라는 구단이 잠재력과 기량을 인정해 계약하고 육성하는 선수들이다.
그렇다면 고민해야 한다.
한국 프로축구를 선도하는 구단의 1군 선수단이 이 정도의 기량 차이를 보이는 게 정상적인 일인가.
어린 선수들에게 경험이 필요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실전을 통해 성장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성장 가능성만으로 모든 결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출전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에 걸맞은 경기력과 경쟁력을 보여줘야 한다.
구단 역시 마찬가지다. 선수와 프로 계약을 맺고 1군에 등록했다면 그 선수들이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서울은 유소년 육성에만 매해 20억 원 이상을 투입한다. 서울은 한국에서 체계적인 유소년 시스템을 갖춘 대표적인 구단이기도 하다. 당장의 성과보다는 미래를 바라보는 투자라는 점에서 의미도 크다.
그러나 투자 규모가 육성의 성과를 보장하는 건 아니다. 유소년 팀에서 성장한 선수가 프로에 입단하는 것만으로 육성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프로에 진입한 뒤 얼마나 성장하는지, 1군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발휘하는지, 장기적으로 구단과 한국 축구에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지까지 살펴봐야 한다.
1군 선수단의 규모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선수층이 두껍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몇 명의 선수를 보유했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되느냐’다.
서울이 올 시즌 ACL2 2경기에서 보인 경기력과 결과는 그 차이를 돌아보게 한다.
#. 근본적인 의문점, 한국 축구계에 투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축구계 문제의 핵심은 ‘돈을 얼마나 더 쓸 것이냐’가 아니다. 지금 쓰고 있는 돈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일이다.
K리그를 비롯한 한국 축구계가 진정으로 한국 축구의 발전을 고민한다면 매년 지출하는 예산이 실제로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K리그 구단들의 예산은 결코 적지 않다. 적게는 수십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억 원에 이르는 돈이 매년 프로축구단 운영에 쓰인다.
1983년 출범한 K리그에서 프로축구단이 한 해 예산을 뛰어넘는 흑자를 낸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상위 리그인 K리그1의 우승 상금은 2012년부터 5억 원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중계권료 수익이 있어서 구단 운영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평균 관중 수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K리그는 여전히 팬이 있어서 존재하는 게 아닌 기업과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금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뿐이다.
한국은 축구가 국기(國技)인 국가가 아니다.
축구가 일상과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일부 국가와 비교하면 축구의 사회적 기반도 다르다. 학교 교육에서 체육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지, 엘리트 선수 육성과 생활체육의 연계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에도 의문이 남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과 지방자치단체들이 프로축구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물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 더 좋은 선수를 영입하고, 훌륭한 지도자를 확보하며, 훈련 환경과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돈이 더 필요하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과 지방자치단체가 왜 프로축구에 투자해야 하는지, 그 투자가 구단과 지역사회, 한국 축구에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투자한 돈이 어떤 성과로 이어지는지 입증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 축구계는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투자 확대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기존 투자의 효율성과 성과를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는 데에도 그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번 동남아시아 구단들의 연이은 한국 원정 승리를 단순히 외국인 선수가 많아서 벌어진 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한국 축구를 분석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선수를 영입했으며, 준비한 전술을 경기장에서 구현했다.
이제라도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쓰고 있는 돈은 정말 한국 축구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쓰이고 있는가.
동남아시아 구단들이 한국에서 연달아 승리하는 시대가 왔다.
이제라도 한국 축구에 투자되는 돈을 어떻게 써야 진정한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고민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위기의식이 없다면 K리그는 지금보다 빠르게 도태될 것이다.
[상암·포항·강릉=이근승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