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민은 야구명문 세광고를 나왔다. 빙그레 동료였던 송진우, 장종훈이 고교 후배다. 고2 때 대구 대붕기에서 우승하고 학교 환영행사에 참석한 한희민. 사진=한희민 제공
[매경닷컴 MK스포츠(계룡) 김우성 기자] 한희민은 원래 농구선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농구부에서 운동을 했다. 고향의 영동중학교에서도 농구를 하려 했는데 그가 입학할 즈음 농구부가 없어지더니 야구부가 생겼다. 그저 운동이 계속 하고 싶어서 시작한 야구였다. 한희민은 야구명문 세광고를 나왔다. 빙그레 동료였던 송진우, 장종훈이 고교 후배다. 고교 1학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오버핸드 투수였다. 사이드암 투수 출신이던 감독의 권유로 2학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언더핸드로 전향했다.
“새로 부임하신 김승성 감독님이 어느 날 언더로 바꿔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기에 시도해봤던 게 저한테 너무 잘 맞았어요. 감독님이 안 계셨으면 저라는 존재도 없었을 거예요.”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학년생 한희민의 호투에 힘입어 세광고는 대구 대붕기에서 우승했다. 3학년 때도 전국대회 트로피 하나를 더 들어 올리고 성균관대에 입학했다. 동기로는 해태 장채근, LG 김태원, 쌍방울 이연수 등이 있었다. 한희민은 그들과 춘계리그 우승을 일궜다. 전성기의 시작이었다.
“대학 재학 중에 국가대표가 됐어요. 그때가 제 야구인생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입니다. 대표팀에 발탁되자마자 83년 아시아선수권에서 우승을 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죠.” 한희민은 국가대표로 1984LA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제대회에 수없이 등판했다. 지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당시 대만 일간신문 민생보는 WBC 특집기사에서 ‘대만 대표팀은 80년대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한희민에게 꼼짝을 못했다’라고 소개한 바 있다.
(상단 좌측)1984년 LA 올림픽에 참가한 김용수, 이상군, 한희민 (상단 우측)같은 대회 류중일, 한희민 (하단) 한희민이 주최한 낚시대회에서 빙그레 멤버들. 뒷줄 왼쪽 송진우의 야전상의가 눈길을 끈다. 사진=한희민 제공
한희민은 빙그레 입단 후 세 시즌 동안 완투를 36회나 했다. 투수 분업화가 철저한 최근의 시각에서 보면 경이적인 투혼이다.
“비결이요? 투수에게는 ‘승’이죠. 오로지 승리를 보고 한 겁니다. 몇 승을 했느냐가 연봉을 결정지으니까.” 1991년 6월20일. 시즌 전적 2승1무2패로 팽팽히 맞서던 해태와 빙그레가 광주구장에서 만났다. 9회말까지 1-1로 승패를 가리지 못한 두 팀은 연장전에 돌입했다.
당대 최고의 투수 선동렬은 이날 빙그레 선발 전원으로부터 18개의 삼진을 빼앗았다.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이었다. 선동렬을 상대로 한치 양보 없이 해태 타선을 틀어막고 있던 빙그레 투수는 한희민이었다.
10회, 11회, 12회... 한 이닝이 끝날수록 관중석의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경기는 결국 13회까지 치르고 무승부로 끝났다.
“몰라 잘 기억 안 나...아무튼 선 감독은 매력적이면서 얄미운 선수였어.” 한희민은 빙그레 시절 가장 든든했던 동료로 유승안을 꼽았다.
“카리스마가 대단했어요. 그 형 말 한마디면 꼼짝 못했으니까. 하하. 포지션이 포수이다보니 마운드에서나 더그아웃에서나 승안이형만 보면 든든했죠.” 흥미로운 건, 선동렬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6번이나 합작한 포수 장채근이 한희민과 절친한 사이라는 사실이다. 장채근이 해태 입단 초기에 한희민이 있는 빙그레로 보내달라고 애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대학 때부터 줄곧 친했어요. 지금도 앞뒷집에 살아요. 가족끼리도 친하고, 재밌게 지냅니다. 기아 코치직도 채근이가 감독님께 추천을 해줬던 거고요.” “장채근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가끔 좋은 공도 주고 그랬습니까?”
“줘도 못 쳐.”
선동렬과 배터리를 이뤄 빙그레의 한국시리즈 우승꿈을 매번 무산시켰던 장채근(오른쪽)은 한희민과 30년 가까이 우정을 쌓아온 친구다. 사진=한희민 제공
한희민은 1993년 갑작스럽게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을 했다. 감독과 갈등이 깊어져 LG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은퇴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구단은 삼성으로 갈 것을 제의했다.
“그때 성격을 차분하게 가다듬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한들 뭐하겠습니까.” 삼성에서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던 그는 생소한 대만프로야구 준궈 베어스에 입단했다. 대만은 아마와 리틀야구는 강세인데 프로야구는 경기력이나 운영 면에서 한국과 수준 차가 컸다.
“허술했죠. 원룸서 생활했어요. 직접 밥 하고 동료들 불러서 식사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다른 팀에 가보려고도 했는데 금세 마음을 접고 스스로 은퇴를 했어요.”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대전에서 야구교실을 열었다가 이마저도 문을 닫고 귀향해 산 속에 찻집을 냈다. 한희민이 도인처럼 살아간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이때다.
“야구는 기록이잖아요. 투수라면 ‘100승’인데 저라고 왜 아쉬움이 없겠습니까.(웃음)” 언더핸드 투수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공 10개를 던져 그 중 7개만 성공시켜도 컨트롤 면에서 특A급이라는 평을 받는다. 공에 힘과 스피드가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곧바로 장타로 연결되며 바가지 안타를 얻어맞는다. 그만큼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이고, 선수 수명도 짧다.
한희민은 독수리 유니폼을 입고 데뷔한 첫 5년간 66승39패20세이브에 평균방어율 3.00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같은 기간인 88, 89년에는 2년 연속 팀 내 최다승(각 16승)을 올렸다.
이글스 팬들에게 강한 기억을 남기고 그라운드를 떠난 그는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수더분한 표정으로 ‘청정 계룡’ 자랑을 늘어놓았다.
“계룡이 대전 도심보다 기온이 4~5도가 낮아요. 그만큼 맑다는 거죠. 참 살기 좋고, 잠깐 쉬러 오시기에도 좋을 거예요. 우리 언제 또 만나요?” 기자가 아닌, 팬들에게 전하는 말로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