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임호균은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현역 선수, 코치, 방송해설가의 경험과 미국 프로스포츠를 체계적으로 배운 경험을 토대로 한국야구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다. 임호균의 베이스볼 아카데미 & 클리닉’을 개소했다. 사진=임한별 기자
[매경닷컴 MK스포츠 김원익 기자] 야구계에 별들은 많지만 전설이라고 불릴만한 인물은 많지 않다. 프로야구 태동 이전 실업야구와 프로야구 초창기 큰 획을 그었던 1cm 제구의 전설, 임호균(56)을 찾았다.
임호균은 1982년 서울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했다. 실점은 단 0점. 대회 3승으로 최다승과 MVP에 오른 선동열, ‘개구리번트’의 김재박 등의 스타들에 가려진 숨겨진 영웅이었다. 파나마전 최동원에 이어 구원투수로 경기를 마무리했고, 도미니카전 박동수와 합작 완봉승, 호주전 연장 6이닝 무실점 등, 중요한 순간마다 활약하며 대회 평균자책점 ‘방어율 상’을 수상했다. “준결승 호주전에서 10회부터 6이닝인가를 던졌을 것이다. 연장승부가 다음날까지 이어졌는데 결국 7-6으로 천신만고 끝에 15회말 연장전에서 승리했다.”
다시 프로 데뷔해로 돌아가서 원년 최약체팀 삼미의 이듬해 반란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1983년 전해 꼴찌 삼미가 5월까지 당당하게 1위를 달렸다. 그러다 그라운드 폭력으로 감독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한숨을 푹 쉬면서) 전반기에 김진영 감독님이 잡혀가면서 모든 게 수포가 됐지. 후반기에도 백인천 감독님이 가정사 문제로 구속되면서 그 해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 때 김진영 감독이나 백인천 감독 둘 중 한분만 구속이 안됐더라면 삼미의 1983년이 어땠을까 싶다. 김 감독이 구속된 일은 내가 던진 경기 때 사건이 생겼다. 그날 이상하게 번번이 심판의 스트라이크 판정이 좋지 않았다. 1경기 1경기에 전반기 우승 여부가 달린 상황이라 다들 민감했다. 내가 1점을 내줘서 7회까지 0-1로 지고 있었다. 그러다 8회 2사 만루 찬스를 잡았다. 결국 최홍석이 좌전 적시타를 치면서 2,3루 주자가 홈으로 들어와서 2-1로 역전했다.”
그런데 1-1로 판정이 번복됐다. “김진우가 1루 주자로 있고, 이선웅이 2루에 있었는데, 김진웅의 홈 쇄도보다 이선웅의 태그 아웃이 더 빨랐다는 심판진의 판단이었다. 감독으로서는 당연히 항의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진영 감독이 항의하러 나왔다가 판정이 번복되지 않자 분에 못 이겼다. 김 감독이 백스톱 뒤에서 경기 진행을 종용하는 이기역 심판위원장에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물 때문에 몸이 닿지 않았고 허공에 발길질을 하다 본인이 그물에 걸려 넘어졌다. 그런데 하필 청와대 쪽의 높은 분들이 그걸 보셨나보다(쓴웃음)”
결국 김 감독이 전격 구속됐다. “사회가 어수선할 때였다. 위에서는 김 감독의 행동이 사회 기강을 문란하게 만든 일이라고 판단했다. 야구 판정에 항의해서 그라운드에서 몸 싸움을 했다고 프로 감독을 구속시키다니 참...요즘 같으면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때는 시절이 그랬다. 경기장을 찾아와서 바로 수갑을 채우려고 하는데, 선수들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형사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김 감독이 경기장 밖을 제 발로 걸어 나가서 경찰차를 탔다.”
레전드 투수 임호균의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사진=임한별 기자
선수들의 심리적인 충격이 심했을 것 같다. “그랬다. 성적이 상위권이었는데 감독이 없으니 선수들이 모두 흔들렸다. 선수단에게 감독은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부모가 황당한 이유로 구속되는 걸 지켜봤으니 코칭스태프들이 있었지만 분위기가 영 어수선했다. 결국 김 감독은 구속 10일 만에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지만 명예를 실추했다고 판단하고 정계 고위층의 눈치를 본 구단으로부터 자체 징계를 받았다. 경기장조차 올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선수단이 결의해 ‘경기 보이콧’이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사건 발생 이후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묵묵부답인 구단에 극단의 호소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대전에서 시합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유성온천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다음날 경기를 앞두고 선수단 전원이 모였다. 중요한 시점이니 만큼 구단에 선처를 호소하자는 결론이 났다. 그런데 코칭스태프를 포함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구단에 의견을 전달할 사람이 없었다.”
팀의 중심인 장명부 선수나 코치들이 나서지 않았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결국 코칭스태프 포함 전 선수단이 모인 큰 방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구단에 전화를 걸어 김 감독의 지위 회복을 위해 선처를 호소했다. 보이콧을 결정한 경기들이 비가 오면서 시간이 생겼고 구단이 조건부로 제안을 수용하면서 최악의 상황은 안나왔다.”
그런데 결국 그 일로 총대를 멘 것처럼 돼서 구단에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다음해 롯데로 트레이드 된 것도 그런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장명부 씨는 우리와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무슨 뜻인가? “아무래도 당시에는 프로가 태동한 지 얼마 안되는 상황이라서 선수들의 의식이 미숙했다. 일본에서 프로로 이미 활동했던 장명부 씨는 이런 일로 선수들이 ‘보이콧’까지 해가면서 나서야 되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당신과 다른 선수들은 왜 그럼 보이콧을 결의 했나. “그때는 우리가 부모없는 자식이라는 데 생각이 같았다. 결국 내가 나선 것도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팀을 위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문제였다.”
다음해 사상 초유의 1-4 트레이드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삼미는 팀의 프랜차이스타로 영입해 장명부와 함께 마운드의 60%를 책임졌던 임호균을 1년만에 롯데로 보냈다. 우경하, 박정후, 권두조, 김정수와의 전격 트레이드는 삼미가 부족한 선수층을 보강하긴 했지만 마운드의 든든한 축을 포기한 것이라 이해할 수 없다는 전문가들의 평이 많았다) “호텔에 있다가 후배가 정오 뉴스를 보고 갑자기 연락을 해서 TV를 켜서 소식을 들었다. 충격이 컸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고 정신이 멍했다. 그러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먼저 김진영 감독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미안하다’는 말씀만 하시더라. 감독님의 판단이 아닌걸 알고 구단 사무실을 찾아갔다. 단장 포함 프런트는 이미 모두 자리를 비운 훌였다. 결국 수소문을 해서 서울 방배동 스크린골프장에 있던 삼미그룹의 김현철 회장을 직접 찾아갔다.
사진은 흐려졌지만 기억은 흐려지지 않았다. 청보 핀토스 시절 마운드에 서 있는 임호균. 사진=임호균 제공
대단한 강단이다. 순순히 만나주던가. “김진영 감독도 내가 걱정돼서 같이 동행했다. 그리고 김 회장이 의외로 침착하게 나를 맞더라. 긴 대화를 나눴다. 내가 삼미에 오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무엇 때문에 팀에 걸림돌이 됐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그것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김 회장은 ‘자신도 방금전에 보고를 듣고 나중에 안 일’이라며 ‘미안하다’고 말하더라. 결국 이미 늦었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딱 한 마디만 남기고 돌아왔다.”
그 말이 무엇이었나? “‘인천야구에 누가 더 애정을 갖고 지역 야구를 부흥시킬 수 있었을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시 장명부 선수가 당신의 트레이드를 구단에 요청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마 내가 없으면 자기가 더 빛나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잠시 침묵) 그냥 짐을 쌌다.”
대학에 이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제 2의 출발이자 인연이 깊은 故 최동원 선수와의 재회였다. 그리고 롯데의 영광의 순간이 왔다. “생소하면서도 기대가 됐다. 최동원도 그때부터 다시 부쩍 힘을 냈다. 아마 내가 영입되면서 동기부여와 각성이 많이 됐던 것 같다.”
롯데 이적 첫 해인 1984년 10승 9패 평균자책점 2.95로 활약했다. 승수는 적었지만 약체팀에서 완투를 아홉 차례 기록하며 팀 승리에 공헌했다. 에이스 최동원(27승13패 6세이브) 과 함께 원투펀치로 마운드를 지키며 롯데를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시너지 효과가 컸다. “아무리 팀 동료이자 후배라도 라이벌 의식은 있다. 내가 누군가를 목표로 정해 놓으면 코칭스태프들의 지도나 동기부여보다 훨씬 더 분발이 된다. 눈에 보이는 라이벌이 1시간을 훈련하면 나는 2시간을 훈련하고, 100구를 던지면 나는 120구를 던지는 식이다. 서로 동기유발이 많이 됐다.”
당시 명투수들에 비해 부족한 140km에도 못 미치는 볼을 던졌다. 당신의 비교우위는 무엇이었나. “나는 어릴적부터 체구가 작았다. 덩치가 크고 볼이 빠른 선수들과 스피드로 경쟁해서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제구력을 갈고 닦았다. 또 선수들의 심리 등 읽을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원로 야구인 중에는 최고의 제구력으로 당신을 꼽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어느 수준이었나. “적어도 90% 이상의 볼은 모두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볼 끝의 움직임과 종속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딜리버리와 릴리스포인트를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했다.”
당시 김진영 감독의 전격 구속에 대해 임호균씨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사진=임한별 기자
‘1세대 두뇌형 투수’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경기 복기를 참 많이 했다. 기록지를 보면서 분석을 한다. 한 선수마다 나를 상대했던 모든 타석에서 어떤 구질에 배트를 내밀어서 아웃이 됐는지 어떤 코스를 던져서 안타를 맞았는지 분석하면서 한 경기도 빼놓지 않고 모든 경기를 복기했다.”
타자와 서면 그간의 역사들이 그림이 그려지는 정도였겠다. “맞다. 그런 데이터들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비디오 분석도 없어서 스코어북을 보면서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나만의 것’ 그리고 ‘남과 다른 것’을 가지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제구력의 관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배짱이 첫 번째다. 자신감을 가지고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던져야 한다. 타자들도 타석에 서서 맞힐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때 좋은 타격이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 투수들은 결과를 미리 속단하고 던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한계 투구수 같은 것들이 그렇다. 자기의 한계를 미리 정해놓으면 투수는 50%의 위력도 발휘하지 못한다.”
좋은 투수의 조건이 있을 것 같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첫 번째는 자신감이다. 프로로 뛰는 선수들은 이미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잠재력을 꽃피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두 번째는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을 믿게 해주고 살아남게 해준다. 직구에 포커스를 맞추던, 변화구에 특출난 위력을 보이던지 간에 나만의 장점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제구력을 갈고 닦기 위한 영업비밀이 있다면.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자신감이다. 그것은 자신이 코너워크를 100%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야만 가능하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제구가 가능할 때까지 그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야구가 많이 발전했고 많은 구종들이 생겨났다. 최근 선수들을 보면 다양한 구질들을 던지는 능력이나 직구의 위력은 좋지만 제구력은 떨어지는 것 같다. 완벽하게 채우지 못하고 다른 것에 치중하다보니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진다.”
후배들이 새겨들어야 할 지적인 것 같다. “야수들도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던질 수가 있다. 스트라이크존에 공을 던진다고 다 투수가 아니다.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어야 투수다. 야구의 체계적인 발전으로 야구가 분업화가 됐다. 한계 투구수는 어디서 나온 개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미국의 선진 야구를 쫓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투수는 한 경기를 책임질 수 있다는 마음가짐, 적어도 그 책임감이 없이는 마운드에 올라서는 안 된다.”
그런 당신이 1984년 한국시리즈 6차전 4회를 끝으로 마운드에서 자진 강판한 적이 있다. “맞다. 그때 최동원과 교체됐다. 당시 강병철 감독이 요청한 것도 아니었고 최동원이 나선 것도 아니다. 내 판단이었다. 당시에는 개인의 열망보다 우승이라는 떡이 훨씬 커보였다. 2차전에 구원으로 뛰었고 4차전과 6차전에 내리 선발로 등판했다. 그런데 4회까지 3-1로 이기고 있는데 6차전을 잡으면 분명 우승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4회 팀이 3점을 내는걸 보고 최동원을 불러서 ‘내가 오늘 (승리투수가 되는 걸) 포기할테니 오늘 뛰고 7차전에 등판할 수 있겠냐”라고 물었다. 단 조건으로 최동원이 승리투수가 되는 걸 걸었다. 그러니 최동원이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묻더니 마운드로 올라가더라. 만약 반대의 경우라도 나도 한다고 했다. 투수라면 당연히 그 상황에서 나설 것이다.”
그래도 한 회만 더 막고 경기가 스코어 그대로 끝나면 당신이 한국시리즈 6차전 승리투수가 될 수 있었다. 욕심이 없었나. “그래서 5회였다. 최동원이 6회부터 나와서 경기가 끝났으면 그냥 구원이다. 하지만 5회부터 뛴다면 승리 투수가 될 수 있었다. 선수가 팀에 앞서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면 팀은 무너진다.”
롯데에서 1986년까지 활약한 이후 1987년 인천 연고지팀인 청보 핀토스로 돌아왔다. 첫 해 완투 11회(완봉 1회) 9승 10패 평균자책점 3.78로 활약했다. 하지만 역시 삼미와 롯데 시절처럼 약한 타선과 부실한 수비진 때문에 승수는 물론 평균자책점에서도 많은 손해를 봤다. “구단이 프랜차이즈 스타를 원했던 것 같다. 다 내 복이지 뭐.”
1998년부터 하향세를 탄 이후 1990년 김성근 감독과 구단 간의 ‘5승 각서 파동’이 벌어졌다. 구단이 당신에게 은퇴를 종용하자 김 감독이 ‘임호균의 5승에 감독직을 내걸고 각서를 썼고 구단이 이를 선발 5승으로 바꿨다’는 설이 파다했다. “(잠시 숨을 고른 이후 무거운 표정으로) 현재 김성근 감독이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김 감독이 부임하시기 전 이미 은퇴를 결심했고 구단에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이미 유학을 결심했는데 김 감독께서 나를 붙잡았다. 아마 연고지 고참 선수로 팀을 잡아주기를 바란 것 같다. 나에게 ‘니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당시에는 성적보다 리더를 바랬다.”
(그 해 임호균은 7경기에 등판해 승패없이 평균자책점 4.60을 기록했다)
은퇴 이후 당초 계획했던 지도자 연수가 아닌 방송해설가로 변신했다. 순수 프로 출신 1호다. 현재 많은 선수출신 위원들의 원조인 셈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허구연 위원과 하일성 위원 등이 당시에도 야구해설가로 활약했지만 감독을 거치거나 아마야구까지 선수로 뛰셨던 분들이다. 순수 프로 선수로만 뛴 해설가는 내가 최초였던 것 같다. 은퇴 이후에도 세이부 라이온즈 코치 연수를 받으려고 계획 중이었는데 MBC에서 제의가 들어와서 1년을 하고 SBS에서 2년을 해서 총 3년을 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1994년 LG 트윈스 코치를 재직한 이후,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삼성 투수코치를 맡았다. 그러다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쉽지 않은 인생 도전이다. 미국에서의 선택도 놀랍다.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학사모를 썼다. “미국행은 자녀들의 학업 문제를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언어 문제가 많이 발목을 잡았다. 세인트토머스 대학에서 스포츠마케팅을 전공하고 석사까지 마쳤다. 당시 교수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내가 한국에서 선수와 코치로 뛴 사실을 알고 난 이후 서로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교류를 많이 했다.”
미국의 스포츠 현장을 직접 공부하고 배우면서 느낀 것이 많았겠다. “미국은 스포츠의 천국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스포츠 환경에서 보고 느낀 것도 많았고 인프라와 시스템을 보면서 부러움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그 부분들을 유심히 보면서 한국에서 돌아와서 내가 한국야구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들을 많이 찾았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전공했던 스포츠마케팅이었다.”
마운드 위에서 불독 같았던 다저스의 레전드 오렐 허샤이저(오른쪽)도 아마 구단주를 이렇게 독대하진 못했을 것 같다. 삼성 투수코치 재직 시절 당시 임호균과 오렐 허샤이저. 사진=임호균 제공
‘야구교실’을 넘어 유소년 야구 육성, 부상 선수들의 재활 클리닉, 한·미 야구의 교류와 야구 연구를 위한 ‘임호균의 베이스볼 아카데미 & 클리닉’의 개소했다. 어떤 도전을 시작한 건가. “미국의 스포츠 환경을 직접 보고 경험하니 한국 야구의 인프라에 대해서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유소년을 비롯해서 선수들에게 체계적인 환경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또 개별 지도를 통해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위한 준비나, 프로 지명 이후의 몸을 만들어 가는 과정 등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클리닉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 “선수 재활과 관련된 병원과 제휴를 맺고 선수의 몸 상태와 경기 영상 등의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선수 재활의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지도할 예정이다. 전문가들과 코치들이 선임이 되고 있고, 인력도 더 충원할 계획이다. 인내심을 갖고 재활에 성공하도록, 또 선수의 최고의 순간을 돌려주기 위해 어떤 포인트를 보완해야 하는지를 집중해서 지도할 방침이다.”
메이저리그 관게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과 미국의 야구 교류를 위한 가교 역할도 할 수 있겠다. “아카데미와 클리닉의 개념도 있지만 이번에 개소를 하게 된 것은 한국과 미국의 야구를 서로 교류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지속적인 연구를 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꾸준히 서로 정보를 공유하면서 조언을 구하면 야구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모든 문의를 환영한다.” (임호균의 베이스볼 아카데미 & 클리닉,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101-1 우성B 상가 3층 305호 문의: 02-425-6777)
선수로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나. “그런 건 없었다. 모든 순간이 최고였다. 명망이 높은 타자들을 맞아서도 적극적인 마음으로 상대했다. 그리고 이후에 느끼는 즐거움은 있었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서 어떤 타자들을 상대했다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장효조 같은 훌륭한 타자들이 나오면 더 경계를 하긴 했지만(웃음) 그 때도 특별하게 의식한 것은 없다.”
1987년 8월 25일 인천에서 당시 최강의 타선 해태를 상대로 최소 투구수인 73구 완봉승을 거뒀다. 백인호-송일섭-김봉연-김성한-김종모-한대화-이순철-장채근-서정환이라는 말도 안되는 최강 타선을 상대로 완벽한 경기를 했다. 그 때 마음도 똑같이 덤덤했나?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때 해태의 공격적인 특성을 오히려 역이용했다. 유인구를 많이 던지면서도 나의 투구 템포나 패턴을 한 번 더 꼬았다. 나는 원래 삼진에 욕심이 없는 투수였다. 삼진을 많이 잡으면 투구수가 많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그 때 2시간 전후의 경기 기록도 꽤 많다. 목표는 타자를 제압하는 것뿐이었다.”
임호균은 1958년생인 故 최동원, 김시진 보다 2살이 많다. 이들은 프로야구가 좀 더 빨리 출범했다면 야구사에 더 많은 족적을 남겼을 투수로 관계자들에게 손꼽힌다. 이들은 1963년에 태어난 ‘국보투수’ 선동열이 프로에서 보여준 것만큼의 임팩트를 실업과 아마에서 보여주면서 국민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겼다.
최초의 인천 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 ‘두뇌형 투수’의 선구자, 순수 선수 출신의 1호 야구해설위원, 73구 완봉승의 전설 임호균과의 기억은 그래서 더 값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