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자,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계에는 가족이 있고 그 가족의 세계에는 누군가가 부재한다.
십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구축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 이야기 속 가족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를 살아간다. 구성원도 제각각이라 종잡을 수 없지만 절대 모른 척할 수 없는 사연을 저마다 안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천정환 기자
◇ 상실 뒤편의 삶, 아이와 어른 그리고 가족 ‘환상의 빛’(1995)부터 신작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 이르기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끊임없이 가족 서사를 그려왔다. 그 안에는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어느 가족’(2018) 등 저마다 형태는 달라도 어떻게든 가족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은 어떤 모습인가. 마냥 웃으며 봐줄 수만은 없는 인물들이 대다수다. 그렇다고 해서 한없이 미워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라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곁에 두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여기에 영화 속 가족은 대부분 상실을 앓는다. 가족구성원의 죽음 혹은 부재 이후 남겨진 자들의 시간이 서사를 채우며 그 속에서 여러 형태의 갈등이 생겨난다. 그 갈등은 대상을 가리지 않아 자신이 되기도, 타인이 되기도 한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데뷔작 ‘환상의 빛’은 학창시절 행방불명 된 할머니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유미코의 상실을 비춘다. 유미코는 동네에서 함께 자란 이쿠오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이쿠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행방불명 된 할머니, 세상을 등진 남편을 기억한 채 살아야 하는 유미코의 일상은 무뎌진 듯 보이지만 사라지지 않는 생채기로 괴롭다.
‘아무도 모른다’의 네 남매는 다시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엄마를 기다리고, ‘걸어도 걸어도’의 가족은 토시코의 큰 아들이자 료타의 형인 준페이가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10여년 후를 살아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속 세 자매의 첫째 사치는 15년 전 가족을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복 여동생 스즈를 만나며, ‘태풍이 지나가고’의 분열된 가족은 각자 어려운 마음을 갖고 어두운 밤을 지새운다.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은 할머니의 연금과 물건을 훔쳐 생활하며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어느 가족이 길 위에서 한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함께 지내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 과정에서 뜻밖의 사건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기서 다시 구성원 각자의 내밀한 진심이 드러난다. 가족과 상실을 동일선상에 놓고 봐온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할머니는 변함없이 배우 키키 키린이었다. 키키 키린은 아주 오랜 시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에서 어머니, 할머니로 자리하며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이 들어가는 한 인간에게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또 하나의 서사를 찾은 걸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든 지독한 현실을 살아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 아이들은 자못 철이 든 모습이다. 현실보다 이상을 따르는, 자녀들을 내팽개치고 집을 나간, 가족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바람난 그런 어른들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두우면서도 밝은 면을 함께 갖춰 또 다른 시각으로 가족 서사를 바라보게 한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포스터 사진=티캐스트
◇ “엄마, 이 책에 진실이라고는 없네요”…진실과 거짓 속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 이후 1년여 만에 선보이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그의 첫 합작 프로젝트로 해외에서 촬영됐다.
오는 12월 5일 개봉하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자신의 회고록 발간을 앞둔 전설적인 여배우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 분)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파비안느의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 분)는 남편 행크(에단 호크 분), 어린 딸 샤를로트(클레망틴 그르니에 분)와 함께 오랜만에 엄마의 집을 찾고 반갑지만 어딘가 어수선한 재회를 이룬다.
잠자리에 들기 전 엄마의 회고록을 읽은 뤼미르는 책 속 내용이 온통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엄마, 이 책에 진실이라고는 없네요”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파비안느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담배를 마저 태운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일본 배우들이 나오지 않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영화이지만 그가 작품을 통해 줄곧 비춰온 테마는 그대로다. 예전부터 가까워질 구석이라고는 없었던 모녀가 오랜만에 함께 일상을 보내며 서로에게 쌓인 오해와 진실을 알아간다. 겉으로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과거의 상처가 눈과 입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그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sunset@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