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자,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영국 출신 톰 후퍼 감독은 고전 서사를 현대로 끌고 와서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과 소통하는 데 능하다. 자칫 지나치게 교훈적이거나 뻔히 여겨질 수 있는 이야기를 살짝 비틀면서도 기본 뼈대는 유지하고, 사건보다 인물에 집중해 재해석한다.
정공법도 톰 후퍼의 특징이다. 얕은 눈속임보다 정면돌파를 택하는 그의 연출법과 시대를 초월한 테마가 만나면 그 어느 영화보다 묵직한 메시지가 된다.
톰 후퍼 감독 사진=옥영화 기자
◇ 고전 서사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재주 톰 후퍼가 고전 서라를 현대적으로 혹은 대중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재능이 있다는 건 이미 자명하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다니엘 데론다’(2002), ‘엘리자베스 1세’(2005), ‘존 아담스’(2008), ‘킹스 스피치’(2010), ‘레미제라블’(2012), ‘대니쉬 걸’(2015) 그리고 신작 ‘캣츠’에 이르기까지 고전 원작을 두거나 역사적 실화를 다룬 작품이 현저히 많다. 고전에 깃든 주제의식이 현대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방증하듯 말이다.
영국의 왕 조지 6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킹스 스피치’는 말더듬증을 극복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왕과 언어 치료사의 계급을 넘어선 우정을 담았다. 조지 6세는 기상천외한 치료법을 시도하는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를 만나 마침내 장애를 극복한다. 톰 후퍼는 이 영화에 별다른 큰 사건을 넣지 않았다. 작위적인 사건이나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드라마에서 오는 감동이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조지 6세는 특권층이다.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건 아니지만 왕족으로 태어났고, 자의에 의해서는 아니지만 왕위에 올랐다. 톰 후퍼는 그런 조지 6세의 계급보다 한 인간으로서 콤플렉스에 집중했다. 왕위라는 이유로 평범을 부정당한 인간이 장애를 극복하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서는 자체가 매력적인 드라마다.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인 조지 6세에게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던 것도 이 지점이다. 과거든 현대든, 특권층이든 서민이든 누구나 밝히지 못할 콤플렉스 하나쯤 품고 있다는 것. 톰 후퍼는 여기에 집중해 몰입과 공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
영화 ‘킹스 스피치’ ‘레미제라블’ 포스터 사진=영화사 그랑프리, UPI코리아
톰 후퍼 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작품이 바로 ‘레미제라블’이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한 세기 동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매체로 옮겨졌다. 톰 후퍼가 연출한 ‘레미제라블’은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적 형식으로 재해석해 거의 모든 대사가 노래로 구성됐으며 영화 매체이지만 뮤지컬 형식을 그대로 재연했다. 가난에 내몰려 빵 한 조각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장발장은 19년이나 옥살이를 한다. 역시나 세상에 내몰린 판틴과 그의 딸 코제트 등 주요인물은 모두 원치 않게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와 계급타파를 꿈꾸며 혁명을 일으킨다. 톰 후퍼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레미제라블’ 또한 스토리라인이 간결하다. 원작의 힘도 크겠지만 굳이 억지 감동을 짜내지 않는 정공법에 가까운 연출이 오히려 선명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통상 프리 녹음은 뮤지컬 영화의 관행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톰 후퍼는 프리 녹음을 거부하고 배우들이 실황으로 노래하게끔 했고, 덕분에 그 유명한 바리게이트 씬이나 각 인물의 처지가 드러나는 여러 장면들에서 녹음으로는 전해지질 않은 감동과 높은 완성도를 성취했다.
영화 ‘캣츠’ 포스터 사진=유니버설 픽처스
◇ “용서와 관용 그리고 친절”…톰 후퍼의 ‘캣츠’ 고전 서사의 현대적 연출과 뮤지컬 영화의 장인으로 불리는 톰 후퍼가 이번에는 젤리클 고양이들의 세상 ‘캣츠’와 만났다.
지난 24일 개봉한 ‘캣츠’는 동명의 뮤지컬 ‘캣츠’를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봄발루리나, 이드리스 엘바가 맥캐버티, 프란체스카 헤이워드가 빅토리아, 주디 덴치가 듀터 러노미, 이안 맥켈런이 거스 역을 각각 맡아 앙상블을 이루며 집이 없는 젤리클 고양이 무리의 하룻밤이 주된 내용이다.
뮤지컬 ‘캣츠’는 1939년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이 쓴 우화시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토대로 제작됐다. 영화 ‘캣츠’는 톰 후퍼가 메가폰을 잡기 전에도 논의된 바다. 1990년대 영화화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무산됐고, 2019년 마침내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이번 영화에서 톰 후퍼는 연출 및 각본, 제작을 겸했으며 전작과 마찬가지로 감정 과잉을 배제하고 최대한 담백하게 스토리를 풀었다. 우여곡절을 겪는 젤라클 고양이들의 저마다 사정에 집중하고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꼼수도 부리지 않았다.
고양이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직접 고양이 분장을 하는 대신 시각특수효과(VFX)를 이용해 모션 캡처 슈트를 입고 연기했다. 이 때문일까. ‘캣츠’는 티저예고편 공개부터 개봉이 된 현 시점까지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일정 수준 이상 인간을 닮았을 때 느껴지는 불쾌감, 즉 언캐니밸리(Uncanny valley) 현상으로 곤혹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톰 후퍼는 일각의 비판에 일일이 반응하기보다 ‘캣츠’가 과거부터 품어온 테마를 더욱 강조했다. 그는 내한 기자간담회 당시 이번 영화에 대해 “용서와 관용, 친절의 테마”라고 표현했다. 고전 속 고양이들이 현대의 VFX 기술로 재탄생해 전하는 메시지는 퇴색되지 않고 오늘날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sunset@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