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방송가는 바야흐로 ‘오디션 포화’ 상태다. 엇비슷한 포맷과 익숙한 얼굴들이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등장하며 시청자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한 시점, MBN 오디션 프로그램 ‘무명전설’은 애초부터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명확한 무대였다.
“정말 이름 없는 가수를 발굴해, 그를 전설의 시작점에 세울 수 있는가.”
제작진 역시 기획 의도를 “전설이 되고 싶어 하는 무명들의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이는 가창력이 뛰어난 1인을 가리는 단순한 경쟁을 넘어, 아직 대중의 조명을 받지 못한 숨은 원석을 발견하고 묵직한 성장 서사를 부여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이었다.
치열했던 경연이 막을 내린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아쉬움’으로 요약된다. 완벽한 기획의 승리라 부르기엔 뼈아픈 모순이 존재하지만, 완전한 실패로 깎아내릴 수 없는 이유는 몇몇 ‘진짜 무명’의 이름을 대중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데 분명히 성공했기 때문이다.
무명이 전설로… 숫자가 증명한 ‘새 얼굴’의 발굴과 잔존력
최종 결과가 보여주는 상징성은 뚜렷하다. ‘무명전설’ 1대 전설의 자리는 성리에게 돌아갔다. 2012년 데뷔 이후 숱한 그룹 활동과 오디션 실패를 겪으며 “생계를 위해 도배 일을 배우며 꿈을 포기하려 했다”던 그의 눈물 어린 우승은, 이 프로그램이 왜 존재해야 했는지를 증명하는 완벽한 인간 극장이었다. 그가 결승전에서 획득한 4,784점은 단순한 심사 점수가 아니라, 벼랑 끝에 선 무명 가수를 향한 대중의 집단적 공감과 응원의 결실이었다.
실제로 방송 초반부터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첫 방송 직후 관련 SNS 클립 누적 조회수는 2,394만 회를 훌쩍 넘어섰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영상이 확산됐다. 기존 스타의 이름값이 아닌, 무대 하나와 간절한 사연 하나만으로 대중의 지갑과 시간을 열게 만든 것이다.
우승자 성리뿐만이 아니다. 첫 방송부터 ‘레전드 무대’를 쏟아내며 준결승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를 꺾고 결승에 직행한 하루, 중반부 1위에 오르며 무명의 반란을 이끈 정연호,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탄탄한 팬덤을 구축한 이대환, 올탑의 성적으로 존재감을 뽐낸 한가락, 어린 나이에도 조회수 100만 회를 넘긴 김태웅 등은 이 프로그램이 낳은 귀중한 자산이다.
오디션의 진짜 성공은 1위 트로피의 주인이 아니라, 방송이 끝난 뒤에도 다음 무대를 기대하게 만드는 ‘발굴 리스트’에 있다. ‘무명전설’은 그 강인한 잔존력을 가진 이름들을 가요계에 남겼다.
18인 유명 가수의 등판, 시청자의 정서적 맹약을 깨버린 패착
하지만 오디션의 뼈대를 이루는 ‘기획의 순도’를 들여다보면 짙은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큰 패착은 프로그램 스스로 내건 ‘무명’의 정의를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시즌 도중 이미 인지도가 탄탄한 유명 도전자 18인을 전면에 투입한 구조는 시청자들에게 큰 혼선을 안겼다.
시청자들이 이 프로그램에 채널을 고정한 이유는, 진흙 속에 묻힌 진주들이 스스로 때를 벗겨내는 치열한 과정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미 세공이 끝난 기성 가수들이 중간에 합류하면서 깨져버렸다. 제작진은 이들에게 더 혹독한 룰을 적용했다고 항변했지만, 시청자들 눈에는 ‘무명’들이 자칫 유명 가수들의 재기를 위한 들러리나 극적 긴장감을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했다. 룰의 물리적 공정성을 떠나, 기획의 명분이 치명적으로 흐려진 순간이었다.
포맷의 기시감과 서열화, 자극 대신 ‘서사’에 집중해야 할 때
포맷의 기시감과 연출 방식도 뚜렷한 한계로 지적된다. 1층부터 5층까지 계급을 나눈 피라미드 구조와 가면 전략 등은 기존 오디션의 문법을 너무 안일하게 답습했다. 또한 탈락자를 구제하는 ‘탑 프로의 선택’ 제도는 시청자의 투표 결과를 뒤집는 자의적 구제로 비치며 공정성 시비를 낳았다.
무엇보다 서열화를 과도하게 부각한 자극적인 편집과 B급 감성에 기댄 연출은, 무명 가수들의 절박한 간절함마저 가벼운 예능 소재로 휘발시키는 듯한 아쉬움을 남겼다.
‘무명전설’ 시즌1의 성적표는 이처럼 뚜렷한 명암을 교차시킨다. 기획의 초심을 끝까지 밀어붙인 완벽한 무대는 아니었으나, 누군가에게는 굳게 닫혀있던 인생의 다음 문을 열어준 가장 절실한 동아줄이 되었다.
과제는 이제부터다. 만약 시즌2가 기획된다면 기득권을 가진 참가자의 개입을 과감히 차단하고, 자극적인 서열화나 예능적 장치 대신 참가자 개개인이 가진 목소리의 힘과 성장 서사에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명전설’은 한 철 자극적으로 소비되고 마는 숱한 오디션 예능의 하나가 아니라, 진짜 무명의 이름을 전설의 출발선에 당당히 새겨 넣는 ‘이름 짓기’의 무대로 한국 방송사에 온전히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