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송가의 가장 큰 숙제는 ‘알고리즘의 스타를 어떻게 안방극장의 언어로 번역할 것인가’다. 유튜브와 쇼츠에서 폭발적인 화제를 모은 인물이 막상 기성 방송에 출연하면 특유의 날것 같은 매력이 반감되거나, 반대로 기존 시청자층과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확대 편성 승부수를 띄운 SBS 예능 ‘비서진’ 시즌2와 걸그룹 리센느의 만남은, 레거시 미디어와 뉴미디어발 라이징 스타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보여준 영리한 모범 답안이었다.
결과부터 놓고 보면 확실한 ‘윈윈(Win-Win)’이다. 일일 매니저로 나선 이서진·김광규와 리센느가 호흡을 맞춘 방송분은 닐슨코리아 기준 분당 최고 시청률 4.9%까지 치솟으며 프로그램의 흥행 화력을 증명했다. ‘비서진’은 포맷의 신선함을 수혈하며 화제성을 다잡았고, 리센느는 온라인의 유행을 넘어 전 세대가 응원할 만한 ‘대중적 서사’와 호감도를 챙겼다.
‘까칠함’ 지운 자리 채운 ‘세대 케미’
사실 ‘비서진’은 첫 방송 당시 700만 뷰 돌파와 함께 넷플릭스 예능 1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출발한 흥행 IP다. 하지만 스타를 수발한다는 설정은 회차가 거듭될수록 익숙함이라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특히 이서진 특유의 ‘까칠한 투덜이’ 캐릭터는 오랜 시간 대중에게 사랑받아 온 안전자산이지만, 시즌2에 접어든 시점에서는 새로운 결의 변주가 필요했다.
리센느 편에서 이서진이 택한 승부수는 ‘까칠함 지우기’와 ‘불균형의 미학’이었다. 제작진은 평균 나이 56.5세인 이서진·김광규와 평균 나이 20.6세인 리센느를 한 프레임에 묶어 35.9세라는 아득한 세대 차이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 극단적인 나이 차이는 이질감 대신 예측 불허의 웃음을 만들어냈다. 마라탕 속 분모자나 젠지 세대의 촉감 장난감인 ‘왁뿌볼’, 그리고 리센느의 유행어인 ‘야호’ 밈 앞에서 당황하고 놀라는 이서진과 김광규의 리액션은 기성세대 시청자들에게는 공감 섞인 웃음을, 젊은 세대에게는 신선한 재미를 안겼다. 50대 베테랑 배우들이 20대 걸그룹의 일일 매니저를 자처하며 눈높이를 맞추려 고군분투하는 과정 자체가 ‘비서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셈이다.
리센느에게 이번 출연이 갖는 의미는 더욱 각별하다. 그동안 리센느는 멤버 원이의 유튜브 콘텐츠(‘안녕하세요원이입니다잘부탁드립니다’)와 ‘야호’ 밈 등 알고리즘이 길어 올린 화제성을 바탕으로 가파른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숏폼과 밈에 기댄 인기는 휘발성이 강하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찰나의 유행을 단단한 대중적 지지기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서사’가 필수적이다.
‘비서진’은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하루 섭외 전화 100통, 광고 제안 100여 개가 쏟아지는 지금의 화려한 스케줄 이면에, 중소기획사에서 출발해 초등학교 운동회와 주민센터 무대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온 리센느의 ‘역주행 성장사’를 자연스럽게 조명한 것이다.
특히 대중의 호감도를 결정적으로 끌어올린 대목은 촬영 현장에서 드러난 이들의 태도였다. 대세 반열에 올랐음에도 여전히 촬영장에서 주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은, 이들이 그저 운 좋게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치열한 무명 시절을 견뎌낸 성실한 청춘임을 방증했다. 온라인 속 유쾌한 ‘밈 소녀’들이 전 세대 시청자가 기꺼이 응원하고 싶은 ‘성장형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너네 떴잖아”…‘자본주의 매운맛’으로 포장한 진짜 어른의 위로
이번 에피소드가 단순한 홍보성 게스트 출연을 넘어 깊은 여운을 남긴 비결은, 두 세대가 교감하는 독창적인 화법에 있었다. 이서진과 김광규는 어린 후배들 앞에서 뻔한 훈계나 감상적인 덕담을 늘어놓는 대신, 현실적인 ‘자본주의 매운맛’ 특강과 행동으로 진심을 전했다.
촬영장에서 주눅 들어 눈치를 보는 리센느 멤버들에게 이서진이 건넨 “너네 떴잖아, 눈치 보지 마”라는 한마디는 이번 방송의 백미였다. 겉으로는 툭 던지는 듯한 특유의 화법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렵게 기회를 잡은 후배들이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날개를 펼치길 바라는 대선배의 묵직한 응원과 연예계 생존 조언이 담겨 있었다. 여기에 촬영 도중 들른 소품숍에서 멤버 원이와 메이를 위해 선뜻 사비로 13만 원 상당의 팔찌와 소품을 선물한 김광규의 다정한 배려는, 세대 차이를 넘어선 따뜻한 온기를 완성했다.
결국 ‘비서진’과 리센느의 만남은 서로에게 가장 필요했던 갈증을 해갈해 준 영리한 결합이었다. ‘비서진’은 까칠함을 덜어낸 자리에 세대 초월 케미를 채워 넣으며 분당 최고 4.9%라는 값진 성적표를 거머쥐었고, 리센느는 알고리즘의 파도를 넘어 대중의 가슴에 이름 세 글자를 각인시켰다.
좋은 예능은 게스트의 진가를 발견해 내고, 좋은 게스트는 프로그램의 수명을 연장한다는 방송가의 오랜 진리가 다시 한번 입증됐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