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자 감독과 배우 한예리가 16년 만에 다시 만났다.
3일 오후 서울 용산구 CGV용산에서 영화 ‘봄밤’의 언론배급 시사회가 진행됐다. 이날 현장에는 강미자 감독, 배우 한예리, 김설진이 참석해 작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한편 ‘봄밤’은 상처를 안고 폐허를 살아가는 ‘영경’(한예리 분)과 ‘수환’(김설진 분)이 죽음을 마주하며 펼치는 처참하고도 애처로운 사랑을 담아낸 시적 드라마다. 2008년 ‘푸른 강은 흘러라’ 이후 16년 만에 장편 연출로 돌아온 강미자 감독은 인간의 상처와 무너진 일상, 그 안에서 피어나는 미세한 온기를 담담한 시선으로 포착하며 응축된 연출과 절제된 미학을 드러냈다.
‘봄밤’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당시 소설을 읽고 뭐라 할 수 없는 깊은 아픔을 느꼈다고 말한 강미자 감독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이 고여있다고 느꼈는데 ‘봄밤’ 읽었을 때 주체할 수 없었다. 제가 느낀 감정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글’을 영상화한 만큼, 표현 방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영화의 형식이 중요했고 내용 그 자체의 연기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한 강미자 감독은 “소설을 읽었을 때 감정이 커서, ‘영화적 꾸밈’으로는 그 감정을 느끼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치장이나 장식을 빼자는 것이 출발점이었다”라고 전했다.
자신이 ‘봄밤’에서 느꼈던 감정을 전하기 위해 사용한 기법은 ‘암전’과 ‘반복’이었다. “한예리만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염두했다”고 말한 강미자 감독은 “두 사람이 만나고, 죽기까지 소설속에 나오는 12년이라는 시간을 영화에서 재현할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감정의 밀도를 어떻게 하면 영화 속 ‘12년의 시간’으로 바꿀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며 “암전의 반복으로 몰입보다는 호흡하고 한 발 떨어져서 봤으면 했다. 거리두기와는 다르지만, 한 호흡 쉬고 보고 하면 감정의 밀도를 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가 싶었다”고 말했다.
강미자 감독의 첫 장편 ‘푸른 강은 흘러라’에서 연변 소녀 숙이 역을 맡은 이후 16년 만에 다시 감독과 재회했다. 강미자 감독은 ‘왜 한예리여야 했는가’라는 질문에 “예전에 내가 영화를 만들 생각이 없을 당시 강단에서 학생들이 한예리가 나오는 영화를 많이 들고 왔다. 그때 한예리의 에너지와 느낌이 좋아서, 내가 나중에 영화를 만들게 되면 이 배우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강미자 감독은 2009년 영화 ‘푸른 강은 흘러라’로 한차례 한예리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12년 만에 ‘봄밤’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에 대해 강미자 감독은 “그 사이 연락 없이 지내다, ‘봄밤’으로 연락했다. 영경이라는 인물이 어떤 감정, 이상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그 이상을 표현해야 했는데, 한예리만한 배우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저만의 느낌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지만 너무 작은 영화였고, 외적인 도움 없이 분장이나 여분의 스태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연락 후 1주일 만에 답변을 주셔서 감사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너무 멋지고 슬프고 아름답다고 해주셨다”고 설명했다.
‘푸른 강은 흘러라’ 이후 오랜만에 강미자 감독과 재회한 한예리는 “감독님께서 본인에게 정말 특별한 영화가 될 거라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듣고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시작을 함께했던 사람이 마무리를 같이하고 싶다고 얘기하는데 출연하는 건 당연했다. 선택권이 따로 없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자신을 보고 영화 출연을 결정한 김설진에 대해 한예리는 “너무 감사했다. 이 이야기가 쉬운 이야기가 아니고 체중도 많이 빼야 하는 캐릭터였다. 다른 의상이나 분장 등 도움받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배우 스스로 역할을 책임져야 했다”며 “아주 적은 예산에 적은 개런티로 부탁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선뜻 답을 줘서 고마웠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김설진과 한예리는 세부 전공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무용을 전공했다는 점은 동일하다. 무용 무대가 아닌 같은 카메라 앵글에 담긴 것에 대해 삼가면서도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말한 한예리는 “영화를 촬영하면서 ‘보통 인연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영경으로 존재했기에, 수환에게 정말 많이 의지했다. 묵직하게 오빠가 주변에 있었고 특별한 말을 나누지 않아도 체온을 나누는 공간 안에서 지탱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좋은 동료와 함께 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는 걸 느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했던 순간들”이라고 고백했다.
“해외 취직했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왔더니 한예리가 배우가 돼 있어서 깜짝 놀랐었다”고 말한 김설진은 “당시 만나서 사는 이야기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영화까지 한 걸 보면 너무 신기하다. 촬영 내내 ‘영경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옆에 있으려 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힘이라고 생각했다”며 “한예리라는 배우와 함께 작업할 수 있음이 영광이었다”고 전했다.
한예리가 극단의 감정을 절제된 시선으로 견디는 내면 연기를 보여주었다면, 김설진는 춤을 통해 다져온 움직임의 언어로 ‘신체적 고통’과 ‘감정의 흐름’을 절묘하게 교차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슬프지 않았다고 밝힌 한예리는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마지막에는 많은 사랑을 수환에게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줄 때도 대단한 멜로로 봤다고 했다. 부디 영화를 너무 고통스럽게만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귀띔했다.
마지막으로 한예리는 ‘봄밤’에 대해 “가끔씩 떠올릴 수 있는 영화가 됏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따듯한 위로가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며, 김설진은 “빠른 시대에 살고 있는데, ‘봄밤’은 어떻게 보면 시대를 역행하는, 조금은 느리고 반복되며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느림의 미학’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고, 이를 통해 머릿속에 시간 머무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한편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Forum)’ 부문과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오늘: 비전’ 부문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며 여러 관객과 만나온 영화 ‘봄밤’은 오는 7일 개봉된다.
[금빛나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