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배들에게 미국의 육상 이론과 실제 전수가 목표 - 아시안게임 멀리뛰기 2연패 김종일 31년 만에 영구 귀국 - 1989년 도미, 석·박사 학위 받고 대학에서 교수 겸 육상 감독으로 활약 - 고국에 진 빚, 후배 육성으로 되갚겠다 - 세계적인 지도자에게 배운 기술과 미국 대학선수 지도 경험 되살려
[MK스포츠]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국 육상의 ‘전설’ 칼 루이스(59)를 키워냈던 탐 텔레즈(88) 선생님을 비롯한 세계적인 육상 지도자들께 배운 이론과 기술, 그리고 미국 대학 육상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습득한 경험을 최대한 살려 우리나라 육상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시안게임 남자 멀리뛰기를 2연패 한 ‘인간 새’ 김종일(59)이 돌아왔다. 그는 현재 미국 미시간주 캘빈대학교(Calvin University) 명예교수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멀리뛰기에서 두 번 모두 7m94를 뛰어 연속 우승한 그가 1989년 미국으로 떠난 지 31년 만에 영구 귀국한 것이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 다음 해 1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워싱턴 주립대에서 6개월간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소화한 뒤 외국인 영어능력평가시험(GRE)을 통과했다. 이어 그해 9월 학기에 이 대학 석사과정(체육행정 전공)에 입학, 1993년 이수했고 바로 박사과정(교육행정 전공)에 도전, 1996년 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시에 있는 캘빈대학교의 체육교육학과 교수 겸 육상팀 감독으로 채용돼 2020년까지 23년간 활동했다. 필자가 현역 기자 시절, 선수로 뛰었던 김 교수를 30여 년 만에 만난 것은 지난 3월25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사무실에서였다. 다음은 MK스포츠와의 단독인터뷰에서 그와 나눈 일문일답.
아시안게임 멀리뛰기 2연패에 빛나는 김종일 캘빈대학교 명예교수가 3월25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MK스포츠와 인터뷰했다. 사진=김종일 제공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귀국해 후배 지도하고 싶었다”
- 반갑습니다. 아직 나이로 보아 미국에서 교수로 더 일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영구 귀국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 “제가 소속된 대학은 교수정년이 없어 80대 교수님도 계십니다. 하지만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저의 오늘이 있게 한 고국을 위해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육상 후배들에게 전수해야겠다는 마음이 압박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재작년부터 미국 생활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작년 11월 10일 귀국해 성남시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한국에서의 적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86 아시아경기 때 받은 우승 포상금(5000만 원)으로 마련했고 워싱턴 주립대 석사과정 첫 등록금도 당시 박정기 대한육상연맹 회장께서 지원해 주신 것입니다.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은 셈입니다.”
충북 진천이 고향인 김 교수가 육상경기에 입문한 것은 1972년 진천 삼수초등학교 3학년 때 이정규 교사의 권유로 100m 달리기와 높이뛰기, 멀리뛰기를 익히면서부터. 1973년 서울 소년체전 높이뛰기에서 초등부 준우승을 한 그는 진천중 시절인 1978년 대구 소년체전에서 높이뛰기(1m94), 멀리뛰기(6m80) 두 종목을 남중부 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청주고 1학년이던 1979년에도 멀리뛰기 남고부 신기록(7m20)을 수립했다. 그가 멀리뛰기에만 집중하게 된 계기는 청주고 시절 강대곤 체육교사가 당시 “178㎝의 신장으로는 높이뛰기보다 멀리뛰기가 유망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아시안게임 2연패…잠실운동장 관중 환호 못 잊어
- 그래도 화려했던 국가대표 시절을 잊을 수 없을 텐데요….
▲ “청주고 2학년이던 1980년, 마침내 국가대표선수로 뽑혀 태릉선수촌에 입촌했습니다. 1958년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 멀리뛰기에서 우승하신 서영주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기량이 일취월장했습니다. 이어 고교 3학년이던 1981년, 멕시코 청소년육상경기대회에 나가 7m 98의 한국신기록(현재 한국기록은 광주시청 소속 김덕현의 8m22)을 작성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요. 그때 제 나이 19세였습니다. 1982년 서말구(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자) 선배님의 권유로 부산 동아대에 진학했는데 그해 11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선 7m94로 한국육상 첫 금메달을 땄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도 4년 전 그 기록으로 대회 2연패에 성공했습니다. 환호하던 잠실운동장 관중들의 응원을 잊을 수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저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종일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남자 멀리뛰기에서 대회 2연패에 성공한 후 잠실운동장 시상대 1위 자리에 올라 꽃다발을 받고 있다.
김종일이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남자 멀리뛰기 시상식 후 대한육상연맹 회장단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정기 대한육상연맹회장, 장익룡 대한육상연맹 명예회장, 이호종 대한육상연맹부회장(왼쪽부터)
김 교수는 1984년 LA 올림픽에선 한국 육상선수로는 처음으로 8강이 겨루는 결선에 나갔으나 8위(7m86)에 그쳤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허벅지 부상으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아시아 무대를 호령했던 그는 이때 세계의 높은 벽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래서 후진들을 위해서라도 미국의 선진 육상 이론과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결론을 얻었고 때마침 스포츠용품 제조업체인 나이키의 주선으로 1989년 1월 시애틀 인근 풀먼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에서 힘들고 고된 유학 생활에 들어갔다. 이 학교는 1890년 개교한 미국 서부 명문대학으로 문리대 예술과학대 경영대 약대 수의대 등 16개 단과대학에 79개 석사과정, 63개 박사과정이 있고 학생 수 3만여 명에 미식축구 등 스포츠클럽에 가입한 학생은 6000여 명에 이른다. 김 교수는 석·박사과정을 이수하면서 체육대학 조교로 일해 학비 면제와 함께 월 1000달러의 급여를 받아 생활했다고 한다.
미국 대학육상리그에서 4차례 ‘올해의 지도자상’ 수상
- 박사학위 취득 후 미시간주 캘빈대학교에 둥지를 틀었는데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나요?
▲ “워싱턴 주립대에서 학위를 받은 뒤 미국의 3개 대학에 취업을 의뢰했는데 캘빈대가 맨 먼저 답신을 보내 왔습니다. 특히 게일런 바이커(당시 49세) 캘빈대 총장님은 제가 올림픽에 두 번이나 참가한 올림피언이란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조교수 겸 육상팀 감독으로 겸임 발령을 내주었습니다. 재학생이 4000여 명인 캘빈대는 60~70명 규모의 육상팀을 운영해 매년 전미(全美)대학 3부리그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2010년까지 13년간 육상팀을 지도했는데 전국선수권대회에서 네 번의 종합준우승을 차지했고 네 차례 ‘올해의 지도자상’도 받았습니다.”
미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육상강국. 2016년 49개의 금메달이 걸린 리우 올림픽 육상에서 32개의 메달(금13 은10 동9)을 따, 메달 13개의 케냐(금6 은6 동1)를 멀찌감치 따돌리고 종합 1위에 올랐다. 종합 3위는 우사인 볼트가 이끄는 자메이카(금6 은3 동2). 미국은 2019년 도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29개의 메달(금14 은11 동4)을 따, 케냐(금5 은2 동4) 자메이카(금3 은5 동4)를 압도했다. 이러한 미국 육상의 저력은 바로 활기 넘치는 대학 육상으로부터 비롯했다는 것이 객관적 평가다.
미국 남자 멀리뛰기는 세계 최강의 전통
- 미국의 남자 멀리뛰기의 수준을 평가한다면?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최강입니다. 1901년부터 지난해까지 120년간 세계 남자 멀리뛰기는 모두 18번의 세계신기록이 작성됐는데 이 가운데 미국 선수가 13번이나 이름을 올렸습니다. 현재 세계기록 보유자도 미국의 마이크 포웰(58)로 그의 기록 8m95는 1991년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수립된 이래 30년째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웰보다 더 유명한 선수는 칼 루이스로 휴스턴대 재학 시절의 1984년 LA 올림픽부터 1988년 서울,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까지 멀리뛰기에서 4연패를 했습니다. 칼 루이스는 현재 휴스턴대 육상팀 보조코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칼 루이스 스승인 탐 텔레즈 등으로부터 육상 기술 사사
- 선수 시절부터 멀리뛰기의 이론과 실제에 대해 지도를 받았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 “칼 루이스를 1981년 휴스턴대 입학부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15년간 지도하신 탐 텔레즈 선생님이 가장 먼저 떠오르네요, 1984년 LA 올림픽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준비할 때 휴스턴대에서 칼 루이스와 함께 많은 지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과도 좋았구요.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도 텔레즈 선생님의 가르침을 적극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텔레즈 선생님은 늘 도움닫기를 위한 스피드 강화와 발 구름 직전 네 번의 스텝 가운데 두 번째 스텝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또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LA의 남가주(USC)대학에서 USC의 켄 마쓰다 선생님의 가르침도 받았습니다. 구 소련의 세단뛰기 선수였던 빅터 사니에프(1968년부터 올림픽 3연패) 선생님과 1991년부터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종경기 3연패를 이룩한 미국 댄 오브라이언을 지도하셨던 릭 슬론 선생님 등에게도 도약의 이론과 실제를 배웠습니다.”
우선 국내 육상 환경에 적응한 뒤 본격 행보
- 앞으로 국내에서의 활동 계획은?
▲ “우선 국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욱이 미국과 한국의 육상 여건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대한육상연맹의 연간 예산은 15억 원에 불과한데 미국육상연맹의 연간 예산은 400억 원이 넘습니다. 그리고 각급 학교와 대표팀의 훈련 시스템도 상이해 주위의 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부상 예방을 위해 어린 선수들에게 과도한 훈련량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효과를 얻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기회가 된다면 대한육상연맹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면 합니다.”
이종세(전 동아일보 체육부장·용인대 객원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