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5월 경으로 기억한다. 이 당시 장염에 시달려 광주에 있는 한일정형외과에 5일 정도 입원했다. 웬만한 부상이나 통증은 참고 경기에 뛰는 체질인데, 이 당시에는 죽을 만큼 아팠다. 서 있기조차 힘들어서 병원에 입원했다. - 장채근은 1990년 61경기에 출전해 7홈런 21타점에 그쳤다. 시즌 중 장염으로 고생한 탓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다. 사진=장채근 제공
[매경닷컴 MK스포츠(화성) 최종욱 기자] 장채근(48)을 기억하는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해태 왕조’의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던 포수를 말이다. 수호지에 나오는 인물 ‘노지심’이란 별명으로도 팬들에게 친숙한 선수다. 장채근은 1986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해 1994년까지 포수로 활약하다 1995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프로 통산성적은 734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2푼8리 97홈런 285타점. 1988년에는 타율 2할4푼9리 26홈런 58타점으로 팀 선배 김성한(30홈런)과 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통산 세 차례(1988·1991·1992년)의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경력도 갖고 있다.
해태가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를 시리즈 전적 4승 무패로 꺾고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1991년에는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를 품에 안았다. 현역 은퇴 후 1996년부터 2004년까지 KIA 배터리 코치를 맡았고, 2004년부터 2년간 KIA 수석코치를 거쳐 2008년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 배터리 코치로 활약했다.
장채근은 지난 2011년 10월 홍익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홍익대는 장채근 감독 부임 후 대학 야구의 변방에서 대학 야구의 중심으로 궤도이동에 성공했다. 포수 나원탁 등 알짜배기 선수가 대거 입학한 2013시즌에는 대학 야구의 강팀으로 자리잡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장 감독은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혹독한 훈련을 통해 홍익대 선수들을 ‘진짜 야구 선수’로 키우고 있다”며 “이전까지 패배의식에 빠져있던 선수들이 훈련을 통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프로에 입단하는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프로가 될 수 있다’는 목표의식이 생긴 게 가장 큰 소득이다”라며 홍익대 감독 후 지난 1년의 시간을 소회했다.
장채근은 2011년 11월 홍익대 감독 부임 이후 후배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고교야구 최고 포수 나원탁은 장채근 감독으로부터 포수 수업을 받기 위해 프로와 명문대 입단 제의를 거절하고 홍익대 입학을 선택했다. 장채근 감독은 새내기 나원탁을 2013시즌 홍익대 4번타자로 점 찍었다. 장채근 감독이 나원탁의 송구 자세를 바로잡아주고 있다. 사진(화성)=김승진 기자
1988년 시즌 종료 후 여수 화태도에서 개인 훈련을 실시했다. 시즌 종료 후 개인 훈련에 충실한 내 모습이 놀랍지 않은가? 사실 휴가차 화태도에 놀러갔는데 기자들의 사진 촬영 요구에 연출 사진을 만든 것이다. 사진을 잘 보면 운동화가 깨끗하지 않나. 훈련을 열심히 했다면 운동화가 깨끗할 수가 없다. 당시엔 스포츠신문 사진기자들이 이런 장면을 많이 요구했다. 요즘 선수들 같으면 바로 거부하겠지만 그때는 기자들 말씀(?)이 하늘이었다. 장채근은 1988년 107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4푼9리 26홈런 58타점으로 생애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