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 한 획을 그은 작품들에는 어김없이 배우 최민식이 있다. 어느 한 분야의 경지에 오른 이가 새로움에 몸을 던지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만 ‘천문’을 만난 최민식만큼은 예외인 듯하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이하 ‘천문’)는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과 장영실의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배우 한석규가 세종, 최민식이 장영실을 각각 연기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 ‘봄날은 간다’(2001), ‘외출’(2005), ‘행복’(2007), ‘덕혜옹주’(2016)로 인물의 감정선을 세심하게 포착한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자 최민식과 한석규가 ‘쉬리’ 이후 20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다.
“허 감독님이 저와 (한)석규에게 시나리오를 주면서 ‘세종과 장영실 이야긴데 두 분이 알아서 역할 결정하라’고 하더라. 살다 살다 별일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랜만에 석규와 연기한다는 게 정말 기분 좋았다. ‘천문’이 아니라고 해도 출연했을 거다. 사실 세종이 하고 싶었는데 석규가 먼저 왕을 한다길래 그러라고 했다. 나는 뭐가 됐든 괜찮았다.(웃음) 시나리오를 보니 비어있는 공간이 보여서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세종과 장영실이 일 얘기만 했을까. 두 사람은 재미있는 놀이도 함께 하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을 거라는 상상을 해봤다. 여기에 군주로서 세종과 순수한 장영실의 모습 혹은 신하들과 대립이 잘 버무려지면 새로운 사극이 탄생할 것이라 믿었다.”
최민식은 인터뷰 내내 한석규에 대한 각별함을 내비쳤다. 굳이 강조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본심이 그러해서 자연스럽게 묻어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졌다. 한석규와 함께 연기한다는 사실만으로 ‘천문’ 출연을 결정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최민식에게 한석규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함께 관통한 든든한 동료이자 동반자 같은 존재인 듯했다. 두 사람의 각별한 신뢰와 애틋함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우정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세종과 장영실의 이야기가 곧 최민식과 한석규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석규와 나는 갓 스무 살 때부터 봤다. 그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사이니까 뭐랄까, 좀 남다른 느낌이 있지 않겠나. 남들하고는 열 마디 할 걸 우리 둘은 서로 세 마디만 해도 알아듣는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어릴 때부터 함께 연극하고 학생극을 해서 그런지 석규 스타일을 안다. ‘천문’에 대한 해석도 비슷해서 인물을 더욱 디테일하게 그릴 수 있었다. 석규가 세종의 진폭을 자유자재,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걸 보고 ‘어우, 역시 우리 전하’ 싶더라.(웃음) 아무리 후배라도 오랜만에 석규의 연기를 받으며 든든했다. 한석규는 아주 깊은 배우다.”
‘천문’은 사건의 연쇄가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세종 24년, 세종이 이천 행궁으로 행차하던 도중 안여가 부서지는 일명 ‘안여 사건’을 전후로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성에 집중한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을 감독과 배우의 영화적, 합리적 상상력으로 채우는 매력적인 영화다.
배우 최민식이 MK스포츠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과연 세종과 장영실은 어떤 캐릭터였을까. 우리는 순수하고 아이 같다는 데에서 합의를 봤다. 예전에 미국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의 강연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로봇을 너무나 좋아하는 아이 같더라. 천진난만한 열정이다. 장영실과 세종도 그렇지 않았을까. 뭔가에 함께 미쳐있는, 보통 사이가 아닌 관계였을 거다.” 최민식은 뜨겁게 연기한다. 출연하는 모든 작품마다 그랬고, ‘천문’도 마찬가지다. 지난 30년 세월 동안 그 누구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자리를 닦고 지켜온 최민식은 여전히 뜨겁다.
“신구 선생님부터 전여빈까지 다 모인 적이 있다. 그때 석규가 ‘후배들도 많이 생기고 우리는 30년이나 지났으니 지는 해’라고 말했더니 신구 선생님이 ‘너희는 이제 꽃망울이 맺혀 꽃이 피려고 하는 시기’라고 하시더라. 현장에 어른이 계시고 계시지 않고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신구 선생님의 연극을 보고 ‘까불지 말고 열심히 하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열정을 잃어선 안 된다. 내 육신이 되는 한 연기하고 싶다.”
배우 최민식이 MK스포츠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최민식의 긍정 에너지는 스크린 밖까지 분출된다. 굳이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고 격식 차리지 않는 그 태도가 오랜 연기 생활의 힘이 아닐까. “시간이 지나니 유연해졌다. 연기 욕심은 더 생겼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 석규와 덤앤더머를 해도 재밌지 않겠나. 우리는 영화 시장에 세트로 나온 상태니까 감독님들이 얼른 데려다가 써먹었으면 좋겠다.(웃음) 조금 더 장난하고 싶다. 편하게 이런 거, 저런 거 다 해보는 확정의 개념이랄까. 성공과 실패를 가르기보다 앞으로도 다양한 연기를 하고 싶다.” / sunset@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