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무서운 기세로 극장가를 장악하며 누적 관객 수 670만 명을 돌파했다.
천만 영화 ‘왕의 남자’보다도 빠른 흥행 속도에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이번 흥행의 숨은 1등 공신으로 연출은 물론 각본까지 직접 참여해 서사의 밀도를 끌어올린 장항준 감독의 ‘집필 능력’이 재조명받고 있다.
장항준 감독의 각본이 빛을 발한 가장 큰 지점은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그는 단종(박지훈)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거창한 궁중 암투나 정치적 사건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대신 왕이었으나 모든 것을 잃은 소년 ‘이홍위’와 당장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노루골 촌장 현실주의자 ‘엄흥도(유해진)’가 ‘삶’이라는 처절한 바닥 위에서 대등하게 마주 서는 관계성에 집중했다.
전형적인 사극의 문법에서 벗어나, 기록의 빈칸을 특유의 인본주의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장항준은 각색 과정에서 단종을 그저 힘없는 역사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복위를 도모할 만큼의 가치를 지닌 강인하고 매혹적인 인물로 재탄생시켰다.
보통 대작 상업 영화에서는 전문 각본가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감독이 시각적 연출에 집중하며 역할을 분담한다. 그러나 장항준은 이번 작품에서 직접 각본에 참여하며 본인이 상상한 캐릭터의 숨결과 대사의 온도를 카메라 앵글에 오차 없이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과거 ‘라이터를 켜라’, ‘기억의 밤’ 등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는 장항준 특유의 탄탄한 스토리텔링 능력이 첫 사극 도전인 ‘왕과 사는 남자’에서 만개했다는 평이다. 권력의 중심부가 아닌 가장자리로 밀려난 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직조해 낸 그의 글솜씨는, 화려한 스펙터클 없이도 관객들을 1457년의 청령포로 깊숙이 끌어당겼다.
최근 영화 일부 장면에 대한 CG(컴퓨터 그래픽) 퀄리티 지적이 나왔을 때도, 장항준 감독은 “CG 이야기만 나오는 게 다행이다. 연기, 시나리오, 역사 왜곡 논란보다 낫다”라며 재치 있게 응수했다. 이는 농담 섞인 해명이지만, 동시에 영화의 뼈대인 ‘각본(시나리오)’과 ‘캐릭터’가 관객을 설득할 만큼 충분히 견고하다는 스스로의 자신감이 기저에 깔려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리적인 기술의 아쉬움마저 덮어버리는 압도적인 서사의 힘. 메가폰과 펜대를 동시에 쥔 장항준의 뚝심이 ‘왕과 사는 남자’를 올해 최고의 웰메이드 흥행작으로 완성해 냈다.
[진주희 MK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