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사냥개들’ 시즌2가 공개되자마자 뜨겁다. 한국은 물론 공개 3일 만에 92개국 글로벌 톱10에 진입하며 비영어 부문 2위라는 값진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화려한 수치보다 대중의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데뷔 28년 만에 생애 첫 악역 카드를 꺼내 든 배우 정지훈이다.
우리가 아는 ‘비(Rain)’는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세공된 근육으로 한 시대를 호령했던 아이콘이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피지컬은 배우 정지훈에게 때론 무거운 족쇄였다. 로맨스에서는 특유의 아우라가 극을 잡아먹었고, 액션물에서는 감정보다 화려한 몸놀림이 먼저 소비되곤 했다. 그런 그가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 그동안의 안전지대를 박차고 나와 살기 번뜩이는 글로벌 불법 복싱 리그의 포식자 ‘백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이유 없는 악당? 스스로 서사를 빚어낸 뚝심
정지훈이 연기한 ‘백정’은 심판의 편파 판정에 분노해 폭행을 저지르고 영구 제명당한 비운의 복서 출신이다. 캐릭터를 완성하기 위해 그는 허리 디스크와 협착증의 고통 속에서도 진통제를 삼키며 6개월간 복싱 기초를 다시 닦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진짜 칭찬받아야 할 부분은 겉으로 보이는 ‘몸’이 아니라, 그가 치열하게 채워 넣은 캐릭터의 ‘속’이다.
김주환 감독은 정지훈에게 그저 주인공 건우(우도환 분)와 우진(이상이 분)을 무자비하게 짓밟아달라고만 주문했다. 사실 배우에게 ‘서사 없는 절대 악’은 양날의 검이다. 자칫하면 명분 없이 주먹만 휘두르는 평면적인 캐릭터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 텅 빈 캔버스 위에서 정지훈은 영리하게 움직였다. 감독이 지워버린 동기의 빈자리를 파고들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오만한 남자가 건우를 만나 느끼는 묘한 열등감과, 이를 폭력으로 덮으려는 일그러진 욕망을 끄집어냈다. 화려한 발차기나 각 잡힌 액션 대신,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짐승처럼 기괴한 움직임으로 그 공간을 채웠다. 아내 김태희가 “요즘 눈빛이 왜 그러냐”며 놀랐을 정도로 역할에 푹 빠져 살았던 치열함은 고스란히 화면 밖으로 전달됐다.
채찍과 당근: 아쉬운 대본, 그럼에도 빛난 배우의 고군분투
물론 공정한 비평을 위해 쓴소리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사냥개들2’의 백정을 향한 평가가 엇갈리는 건 분명한 팩트다. “왜 저토록 잔인하게 굴고, 두 청년과의 피 튀기는 대결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혹평이 적지 않다.
이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 화살을 오롯이 배우 정지훈에게만 쏘아대는 건 온당치 않다. 인물이 입체적으로 숨 쉴 수 있도록 촘촘한 서사를 깔아주는 건 1차적으로 작가와 연출가의 몫이다.
빈약한 대본의 한계 속에서도 정지훈은 “맞으면서 때리고, 막으면서 때린다”는 치열한 합을 직접 연구하며 빌런의 살기를 살려내려 고군분투했다. 대본의 구멍을 100% 메우진 못했을지언정, 그가 보여준 연기적 치열함마저 폄하될 수는 없다.
몸을 버리고 눈빛을 택한 40대의 반가운 궤적
“이번을 끝으로 (옷은) 이제 그만 벗어야 하지 않겠냐. 나태한 역할을 맡고 싶다.”
정지훈이 인터뷰에서 던진 이 농담 섞인 한마디에는 뼈가 있다. 20대의 비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에너지 그 자체였다면, 40대의 정지훈은 이제 눈빛만으로 서늘하게 스며드는 연기를 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린다.
그동안 스스로 구축해 온 ‘멋진 주인공’, ‘착한 남자’의 이미지를 제 손으로 박살 내는 건 톱스타에게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액션 본능을 꾹꾹 눌러 담고 악인의 날 것 그대로를 표현하려 했던 용기.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을 캐릭터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그의 고백은, 이제야 그가 대중이 원하는 스타의 껍질을 깨고 진짜 ‘배우’의 속살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신호다.
데뷔 28년, 43세에 맛본 첫 악역.
아직 완벽한 100점짜리 변신이라고 단언하긴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안전한 길을 버리고 기꺼이 가시밭길을 택한 이 똑똑한 40대 배우의 다음 행보가 벌써 기다려진다. 춤추던 근육의 힘을 빼고, 눈빛으로 서사를 채우기 시작한 정지훈. 그의 진짜 연기 인생은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 모른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