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해” 외치는 친근한 백부장, 알고보니 ‘아파트’ 암매장 빌런? …백현진의 스펙트럼 [MK★분석]

최근 안방극장을 강렬한 전율과 충격으로 몰아넣은 명장면이 있다.

바로 JTBC 토일드라마 ‘아파트’ 6회 엔딩이다. 평범하고 원칙적인 주민의 리더인 척 뒤로는 온갖 비리와 아파트 이권을 교묘하게 주무르던 트루밸류 스테이트 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서강원(백현진 분)이 마침내 처참한 파멸을 맞이한 순간이다.

신임 회장 박해강(지성 분)에 의해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던 ‘난방비 비리’의 민낯이 낱낱이 들통나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반전된다.

‘연기 잘하는 신 스틸러’라는 수식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종합 예술가 백현진의 독창적인 보법을 들여다보았다.
‘연기 잘하는 신 스틸러’라는 수식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종합 예술가 백현진의 독창적인 보법을 들여다보았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의 배후 권력이자 후원자 이충원(박병은 분)은 서강원을 피범벅이 될 때까지 무참하게 공격했다. 의식을 잃은 그가 묻힌 산속, 그 자리 위로 무심하게 묘목을 심는 이충원의 잔혹한 모습과 묘비처럼 쓸쓸하게 줄지어 심어진 작은 묘목들의 기괴한 미장센은 서강원의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하며 시청자들에게 충격과 깊은 여운을 동시에 남겼다.

이 처절한 몰락을 완성한 주인공은 단연 배우 백현진이다. 권좌에서 내려온 인물이 느끼는 극도의 초라함과 무력함부터, 어떻게든 권력을 되찾기 위해 독기를 뿜어내며 동대표들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집념, 그리고 끝내 파멸을 마주한 순간 공포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는 밀도 높은 표정 변화까지. 백현진은 탐욕과 생존 본능이 뒤엉킨 입체적인 인물의 심리를 정교하게 표현하며 극 전반의 긴장감을 견인했다.

이 독보적인 아티스트의 존재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단순히 ‘연기 잘하는 신 스틸러’라는 수식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종합 예술가 백현진의 독창적인 보법을 들여다보았다.

사진=JTBC ‘아파트’
사진=JTBC ‘아파트’

‘생활 밀착형 빌런’의 탄생과 독보적인 현실 연기론

백현진의 연기가 대중의 뇌리에 깊숙이 박히는 이유는 그가 정형화된 악당이 아닌, 우리 일상 어딘가에 숨어 있을 법한 ‘생활 밀착형 빌런’을 세밀하게 조형해 내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서강원은 주민들 앞에서는 정직하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띠지만, 뒤로는 치밀하게 이권을 주무르는 이중성을 지녔다. 백현진은 이를 평범한 일상의 얼굴로 뻔뻔하게 구현해 낸다.

특히 그의 연기 디테일은 구체적인 신체 활용에서 빛을 발한다. 첫 등장에서 네일 버퍼로 느긋하게 손톱을 다듬는 모습은 타인의 고통이나 윤리적 문제에는 무감각한 그의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단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굳건하던 권력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책상 밑으로 발을 잘게 떨거나,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는 등의 ‘미세한 불안의 신체화 기법’은 인물의 얄팍한 밑천을 화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사진=SBS ‘모범택시’, 디즈니+ ‘무빙’
사진=SBS ‘모범택시’, 디즈니+ ‘무빙’

그의 악역 계보는 화려하다. 대중에게 소름 돋는 악역으로 각인되었던 ‘모범택시’의 극악무도한 박양진 회장을 비롯해,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오태영 상무,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무빙’의 초능력자 정상진(진천) 등 그의 필모그래피는 다채롭다.

백현진은 “실제 부조리한 이들을 끔찍하게 싫어하기에 그들의 생리를 더 잘 안다”는 역설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힘을 잔뜩 준 발성 대신, “사람이 말하듯, 편안하게 대화하듯 연기한다”는 고유의 사실주의 연기 스타일은 시청자에게 묘한 불쾌감과 짙은 현실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예능 ‘직장인들 시즌2’에서 묘하게 눈치 없는 ‘백부장’ 캐릭터로 웃음을 자아냈듯, 그는 서늘한 빌런과 유머러스한 코믹 연기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마스크를 지녔다.

사진=백현진 비정규 앨범 ‘찰라의 기초’ 재킷
사진=백현진 비정규 앨범 ‘찰라의 기초’ 재킷

연기 이전에 ‘음악’과 ‘미술’이 있었다

대중에게는 명품 배우로 익숙하지만, 사실 그는 1세대 아방가르드 인디 전설이자 중견 화가다.

1997년 장영규와 결성한 ‘어어부 프로젝트’ 1집 ‘손익분기점’은 당시 대중음악계에 거대한 아방가르드적 충격을 안겼다. 톰 웨이츠를 연상시키는 흐느끼듯 울부짖는 독창적인 보컬과 염세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노랫말은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이후 그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 ‘삼거리 극장’, ‘춘몽’ 등의 음악감독을 맡으며 천재성을 입증했다.

미술가로서의 궤적도 깊고 단단하다. 홍익대 조소과 중퇴 이후 30년 넘게 붓을 놓지 않은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7’ 후원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삼청동 PKM 갤러리 개인전 와 일민미술관 ‘담담함안담담함 라운지’ 등에서 선보인 그의 작품들은 느슨한 여백과 직관적 색채를 뽐내며 고유의 조형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백현진은 자신을 하나의 운영체제(OS)로 두고 연기, 음악, 미술을 각각 연동되는 애플리케이션(App)처럼 구동한다고 말한다. “‘모범택시’의 지독한 악역 연기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 작업실에서 붓질을 하며 버텼다”는 그의 고백처럼, “세 가지 일을 하기에 오히려 숨을 쉴 수 있다”는 이 유기적 시너지는 백현진이라는 거대한 융합적 예술 세계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다.

사진=롯데렌털, 오비맥주
사진=롯데렌털, 오비맥주

대기업 광고주들이 사랑하는 ‘대세 모델’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예술가적 타이틀과 달리, 최근 그는 대기업 광고주들이 가장 사랑하는 대세 모델로 맹활약 중이다.

오비맥주 카스 제로 캠페인에서는 ‘맛잘알 백부장’으로 변신해 점심 초밥집 회전 레일 위에 누워 등장하는 파격적인 비주얼을 선보였다. 이는 무알코올 음료 광고의 뻔한 클리셰를 영리하게 파괴함과 동시에, 직장인의 점심 해방감을 위트 있게 묘사해 광고주와 평론가 모두의 호평을 끌어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롯데렌터카 마이카/비즈카 캠페인에서는 차량 구매와 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들을 “렌트해”라며 유쾌하게 대변하며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또한 돌고래유괴단과 협업한 ‘멋쟁이사자처럼’ 브랜드 캠페인에서는 “당신의 상상, 세상 밖으로”라는 메시지를 노재원 배우와의 유쾌한 티키타카로 살려내며 청년층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사진=프레인TPC
사진=프레인TPC

듣도 보도 못한 평범하고 유쾌한 노인을 꿈꾸는 거장

백현진은 본업을 쪼개어 부업을 하는 연예인이 아니다. 그는 매 순간 카메라 앞과 무대 위, 그리고 작업실 캔버스 앞에서 동일한 비중과 뱃심으로 창작에 직면하는 진짜 거장이다. “나를 찾는 이가 없을 때 마지막까지 혼자 하고 있을 일은 그림”이라고 덤덤히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예술을 대하는 지독한 순수함마저 엿보인다.

“끝까지 재미있게 예술하다 깔끔하게 죽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나이가 들어서도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리듬으로 걸어갈 백현진의 내일이 기다려진다. 화면을 씹어삼키고 캔버스를 유영하는 이 ‘듣도 보도 못한 평범하고 유쾌한 예술가’의 행보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른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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