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내년 2월 열리는 제69회 미국 ‘그래미 어워즈’에 음원을 출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글로벌 음악 산업 내 ‘제도적 문지기(Institutional Gatekeeping)’ 논란이 다시금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3월 발매한 정규 5집 ‘아리랑(ARIRANG)’으로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앨범 차트를 동시에 제패하는 등 전 세계적인 대흥행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류 시상식 경쟁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이들의 전례 없는 상업적 성과와 그래미가 최근 신설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비영어권 아티스트를 향한 미국 주류 음악계의 굳건한 구조적 장벽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방탄소년단의 멤버 RM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의 국경으로 나뉘기보다 그 자체로 전달되고 사랑받기를 희망한다”며 시상식 보이콧의 근본적인 이유를 분명히 했다.
실제로 방탄소년단의 ‘아리랑’은 발매 직후 미국 ‘빌보드 200’ 1위를 3주 연속 차지하고 타이틀곡 ‘SWIM’ 등 수록곡 13곡 전곡이 ‘핫 100’에 진입하는 등 메인스트림 팝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앨범 발매 첫 주 64만 1000장의 판매고는 2013년 원디렉션 이후 10여 년 만에 그룹으로서 달성한 최고 수치다. 그럼에도 그래미가 이들을 별도의 범주로 묶으려 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음악 비평 매체 아웃룩 리스폰(Outlook Respawn)은 이를 두고 “아시아 아티스트를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격리 전략(Containment Strategy)’”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방탄소년단이 ‘올해의 앨범’ 등 본상(General Field) 카테고리에서 미국 내 주류 팝스타들과 직접 경쟁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얄팍한 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온 미국 레코딩 아카데미의 뿌리 깊은 차별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1959년 시상식이 출범한 이래 그래미의 최고 영예인 ‘올해의 앨범’은 철저히 백인 주류 아티스트들의 전유물이었다. 역사상 흑인 아티스트가 이 상을 받은 것은 마이클 잭슨(1984년), 로린 힐(1999년), 허비 행콕(2008년), 존 바티스트(2022년), 비욘세(2025년) 등 단 12명에 불과하다. 마이클 잭슨이 정규 1집으로 2000만 장을 팔고도 1979년 주요 부문에서 철저히 외면받았던 사건은 그래미의 유색인종 차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대표적 사례다.
그래미의 차별은 비주류 아티스트들의 성과를 팝 본상이 아닌 특정 ‘하위 장르’에 가둬버리는 ‘분리 정책(Ghettoization)’의 방식으로 교묘하게 이루어져 왔다. 블랙 뮤직 아티스트들을 ‘어반 컨템포러리(Urban Contemporary)’라는 모호한 장르에 가두었던 과거가 그 증거다.
2017년 비욘세의 역사적 명반 ‘레모네이드(Lemonade)’가 백인 가수 아델의 ‘25’에게 밀려 본상 수상에 실패하자 전 세계적으로 ‘#GrammysSoWhite’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던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불공정 심사를 비판하며 2021년 보이콧을 선언했던 더 위켄드(The Weeknd)의 사태 이후 그래미는 비밀 위원회를 폐지한다고 밝혔지만, 본질적인 체질 개선은 요원해 보인다. 흑인 음악을 ‘어반’이라는 틀에 가두어 본상에서 배제했던 수법이 이제는 K-팝을 비롯한 아시아 음악을 ‘아시안 팝’이라는 지역적 울타리에 가두는 방식으로 진화했을 뿐이다.
해외 주요 매체들도 그래미의 이러한 폐쇄성과 방탄소년단의 결정을 비중 있게 조명하고 있다. AP통신은 신설 부문이 인종과 지역을 기준으로 한 일종의 ‘인종화된 장벽(racialized barrier)’으로 작용한다는 우려를 전했다. 영국 가디언 역시 방탄소년단의 불참 선언이 “비록 표현은 부드럽지만, 그래미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평가하며 , 단기적으로는 아시아 아티스트의 수상 기회를 늘릴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주류 대표 부문에서 사실상 배제하는 ‘구획화’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그래미 측이 시상식 중간중간 예고 자막을 내보내며 방탄소년단을 시청률을 견인하는 ‘시청률 인질’ 내지는 미끼로 활용해왔다는 점을 상기하면, 방탄소년단의 이번 보이콧은 단순한 불참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메인스트림의 정점에 선 K-팝의 거대한 IP가 더 이상 다양성을 빙자해 배척을 일삼는 서구권의 낡은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글로벌 생태계 속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온전히 증명해 내겠다는 묵직한 선언인 셈이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