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 감독, 인간의 폐부를 파고들다 [김노을의 디렉토리]

매경닷컴 MK스포츠 김노을 기자

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편집자주> 그동안 사랑과 욕망, 사회적 금기를 영화에 녹여냈던 정지우 감독은 통념을 전복하는 데 일말의 두려움도 갖지 않는다. 세 남녀의 치정극부터 여선생과 남고생 그리고 시인과 제자의 사랑이야기까지, 정지우 감독의 영화는 장르의 경계를 마음껏 뛰논다.

정지우 감독의 과감한 이야기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감각적인 파격은 언제나 신선했고 누구나 언젠가 한 번쯤 마음에 품어봤을 혹은 상상해봤을 영화로 공감대를 쌓았다. 게다가 영화의 테마가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도 그가 만든 작품들의 미덕이다.

정지우 감독 사진=김영구 기자
정지우 감독 사진=김영구 기자
◇ 결국엔 모두가 욕망하기에 ‘해피 엔드’(1999) 정지우 감독의 ‘해피 엔드’는 비극이다. 각자의 욕망에 눈이 멀었던 세 사람은 상대의 욕망을 탓하며 다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 안에는 더 억울한 사람과 덜 억울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최보라(전도연 분)와 서민기(최민식 분)는 한 명의 딸을 둔 부부다. 서민기는 실직 3개월차, 최보라는 나름 잘 나가는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다. 정지우 감독은 90년대 가정 속 남녀의 위치를 전복하고 모든 인물마다 저마다 욕망을 부여했다.

이력서 쓸 마음이 없는 서민기의 공간은 책이 빽빽하게 들어차 위태로운 느낌마저 주는 서점과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거실 같은 곳이다. 무엇보다도 거실에 있는 서민기는 언제나 최보라의 시야 내 존재한다. 반면 최보라의 공간은 독립된 구역이다. 다만 정지우 감독은 최보라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안방을 결말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제대로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가 안방을 온전히 비추는 순간이 최보라의 최후라는 건 너무도 비극적인 아이러니다.

영화 ‘해피 엔드’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화 ‘해피 엔드’ 포스터 사진=CJ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인물의 욕망을 그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거다. 노골적이고 거칠게 묘사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내밀하고 간접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혹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수도 있다. 정지우 감독이 택한 건 거리두기다. 모든 인물들에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그들의 심리나 욕망을 가타부타 하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분명히 잣대를 들이밀 수 있을 법한 상황도 섣불리 재단하지 않았기에 인간의 억압과 분노, 욕망을 가식 없이 수면 위로 끄집어 올릴 수 있었다.

영화 ‘4등’ 포스터 사진=프레인글로벌, CGV아트하우스
영화 ‘4등’ 포스터 사진=프레인글로벌, CGV아트하우스
◇ 우리의 적나라한 현주소 ‘4등’(2015)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은 정지우 감독이 지난 2012년 영화 ‘은교’ 이후 3년 만에 만든 작품이 바로 ‘4등’이다.

116분의 러닝타임 동안 ‘4등’을 가득 채우는 건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 내 체벌과 윤리 의식의 부재다. 정지우 감독은 이미 모두가 익히 봐왔음에도 그 누구 하나 선뜻 먼저 입 열지 못한 그 예민한 치부를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준호(유재상 분)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대회만 나가면 4등 신세를 명치 못하는 수영선수다. 준호의 엄마는 큰 아들의 1등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 분)를 붙인다.

‘4등’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제는 폭력의 폐해다. 과거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할 정도로 전도유망한 수영선수였던 광수는 코치의 폭력으로 인해 국가대표를 포기했다. 자신이 그토록 견디지 못한 폭력은 세월이 흐르자 어느덧 무기가 됐다. 광수와 준호 사이의 사실적인 체벌 장면은 스포츠계 고질적인 악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무엇이 됐든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 역시 날카롭게 파고든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포스터 사진=CGV아트하우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포스터 사진=CGV아트하우스
◇ 감정에도 서사가 있다 ‘유열의 음악앨범’ 2017년 영화 ‘침묵’으로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의 드라마를 그렸던 정지우 감독이 이번엔 감성멜로 ‘유열의 음악앨범’으로 돌아온다.

오는 28일 개봉을 앞둔 ‘유열의 음악앨범’은 엄마의 유산과도 같은 빵집에서 일하던 미수(김고은 분)와 우연히 그곳을 찾아온 현우(정해인 분)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1994년부터 오랜 시간에 걸쳐 결말에 다다른 두 사람의 청춘과 사랑은 때로는 눈시울을, 때로는 두 볼을 붉히게 만든다.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경계를 지우며 인간의 내밀함을 관찰해온 정지우 감독은 이번 영화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한 감정의 진폭을 표현한다. 숱한 시간을 엇갈리며 각자의 세월을 살아온 두 남녀가 어떻게 다시 서로의 시간에 들어가는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마음이 촉촉해진다. sunset@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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