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곧 기획 시스템의 진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1세대 아이돌이 등장하던 시절의 주먹구구식 매니지먼트를 지나, 이제 K팝을 이끄는 거대 기획사들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환경과 사회적 책임을 진지하게 논하는 단계에 진입했다.
창립 30주년을 지나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가 26일 발간한 ‘다섯 번째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이러한 산업의 거대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과거 소속 가수의 앨범 판매량이나 콘서트 매진 횟수만을 홍보하던 것을 넘어, 기업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데이터로 입증하려는 시도는 분명 괄목할 만한 진전이다.
ESG 성과, 맏형다운 세심함
이번 보고서에 담긴 지난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성과들은 꽤 구체적이고 다채롭다. SM은 2025년 ESG 활동의 주요 성과로 ▲광야숲 3기 조성 ▲창립 30주년 기념 프로젝트 ▲공연장 접근성 강화 프로젝트 ▲한국콘텐츠진흥원 ‘친환경 콘텐츠 산업을 위한 공연 및 행사 분야 탄소배출 계산기 개발 연구’ 공동 참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협약 10주년 기념 ‘유니세프 팀’ 캠페인 참여 ▲이사회 평가 도입을 꼽았다.
서울숲에 120여 종, 5100본 이상의 자생식물을 심어 총 1290㎡ 규모의 ‘광야숲 3기’를 추가 조성한 것이나,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협약 10주년을 맞아 소속 아티스트 11인이 재능 기부로 캠페인에 동참한 것은 문화 기업이 지닌 선한 영향력의 좋은 예시라 할 수 있다. 특히 창립 30주년 기념 ‘SMTOWN LIVE’ 공연에서 관객 이동으로 발생한 온실가스 배출량을 직접 측정하고, 장애인 관객을 배려해 공연장 접근성 개선 가이드북을 유관 부서에 배포한 점은 대형 기획사다운 세심한 행보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중중대성평가와 ‘매출 1조 원’의 역설
하지만 기획과 산업 구조의 이면을 분석하는 관점에서 이 보고서를 깊이 들여다보면, 칭찬 이면에 가려진 거대한 딜레마를 마주하게 된다. SM은 이번에 기업 경영이 환경·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외부 환경이 기업에 미치는 재무적 영향을 동시에 고려하는 ‘이중중대성평가’를 실시했다.
그 결과 ▲책임감 있는 콘텐츠 제작 ▲인권경영 체계 구축 ▲윤리경영 체계 구축 ▲정보보안 및 개인정보 보호 ▲기후변화 대응 체계 구축 ▲환경을 고려한 제품 및 콘텐츠 확대를 6대 중요 이슈로 선정했다. 나아가 2050년 넷 제로(Net Zero) 실현을 과제로 삼고 기후변화 시나리오 분석 결과와 탄소중립 로드맵을 최초로 공개했다.
문제는 이 장밋빛 로드맵과 회사의 핵심 수익 구조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는 데 있다. 장철혁·탁영준 대표는 보고서를 통해 “연결매출 1조 원 돌파라는 사업적 성과와 함께 ESG 전 영역에서도 의미 있는 진전을 이뤄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엔터 업계에서 매출 1조 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필연적으로 어마어마한 물량의 실물 음반(포토카드 등 파생 상품 포함) 판매와 전 세계를 누비는 대규모 월드투어를 통해 달성된다.
팬사인회 응모와 포토카드 수집을 위해 수십, 수백 장의 앨범을 대량 구매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앨범 폐기’ 문제는 이미 K팝 산업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어 왔다. 대량 소비와 대량 폐기를 부추기는 마케팅 구조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매출 1조 원의 축배를 들며 동시에 ‘탄소중립’을 외치는 것은 모순이다.
심지어 과거 중대성 평가에서 다뤘던 ‘폐기물 발생 관리’ 이슈는 이번 제5차 보고서의 6대 핵심 이슈에서 자취를 감췄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양산하는 실물 앨범 판매 구조는 외면한 채, 온실가스 측정과 탄소중립 로드맵만 화려하게 발표하는 것은 공허한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재 일부를 친환경으로 바꾼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수익 창출 방식 자체를 혁신하지 않는 한, 진정한 넷제로 달성은 요원하다.
‘이사회 평가’에 담긴 진짜 의미
지배구조(G) 측면에서 6대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이사회 평가 도입’을 꼽은 점은 산업적 맥락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불투명한 지배구조로 인해 유례없이 혹독한 경영권 분쟁을 겪었던 SM에게 거버넌스의 투명성은 생존과 직결된 최대 아킬레스건이었다.
이중중대성평가에서 ‘윤리경영 체계 구축’을 중요 이슈로 채택한 것 역시, 과거의 리스크를 완전히 털어내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이제 SM은 특정 1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회사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투명한 이사회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예측 가능한 기업임을 주주와 시장에 증명해야 한다. 이사회 평가 제도의 안착은 잃어버린 시장의 신뢰를 되찾고 기업 가치를 재평가받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안전장치인 셈이다.
‘NEXT 3.0’, 캠페인을 넘어 체질을 혁신할 때
두 대표는 “올해는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단계 진화한 ‘SM NEXT 3.0’ 전략을 가동할 것”이라며 “아티스트와 구성원, 파트너사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권익이 존중받는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고 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맞는 말이다. 다가올 K팝 산업의 핵심 경쟁력은 단연 ‘지속가능성’이다. SM의 다섯 번째 지속가능경영보고서는 K팝이 나아가야 할 당위적 방향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NEXT 3.0’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착한 캠페인이나 숲을 조성하는 것을 넘어, 쓰레기를 양산하고 탄소를 대량 배출하는 비즈니스 모델 자체의 뼈를 깎는 체질 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 30년 전 K팝 시스템의 기틀을 다졌던 ‘큰 형님’ SM이, 이제는 ‘지속가능한 K팝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글로벌 표준을 시장에 제시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