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사의 낡은 자존심이 무너진 자리에 ‘실속’이 똬리를 틀었다.
수백억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들도 시청률 가뭄에 허덕이는 2026년 가을, MBC 일요일 심야 안방극장의 심폐소생을 이끈 뜻밖의 구원투수는 다름 아닌 ‘4년 전 쿠팡플레이 드라마’였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지난 23일 MBC를 통해 TV 최초로 방영된 드라마 ‘안나’가 전국 기준 5.2%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단순한 5%가 아니다. 그간 MBC가 일요일 심야 시간대에 편성했던 금토드라마 ‘유부녀 킬러’ 재방송 시청률은 1.9%에 불과했고, 야심 차게 준비한 광복절 특선영화 대작 ‘노량: 죽음의 바다’마저 2.3%로 씁쓸히 퇴장했다. 그런데 2022년 이미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안나’가 이들을 더블 스코어 이상으로 가볍게 짓누르며 기적 같은 시청률을 빚어낸 것이다.
숏폼이 살려둔 불씨, ‘국민 첫사랑’의 파격 변신
‘안나’의 시청률 돌풍 기저에는 유튜브와 숏폼 콘텐츠의 강력한 알고리즘이 자리하고 있다.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으로 타인의 인생을 훔쳐 살게 된 여자 ‘이유미(그리고 안나)’의 잔혹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2022년 방영 종료 이후에도 수많은 쇼츠 영상으로 재가공되며 젊은 층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어 왔다. OTT와 숏폼으로 다져진 끈질긴 화제성이 지상파 본방송 시청률로 폭발한 셈이다.
무엇보다 극을 끌어가는 수지의 압도적인 원맨쇼가 대중을 홀렸다. 가난하고 고단한 유미에서 화려하고 오만한 안나로 변모하는 입체적인 감정선을 완벽히 소화하며 ‘국민 첫사랑’ 꼬리표를 떼어냈다. 여기에 날 때부터 부유한 진짜 부잣집 딸 현주 역의 정은채, 뚜렷한 목표와 야망으로 안나를 압박하는 남편 지훈 역의 김준한, 따뜻한 조력자 박예영 등 명품 조연들의 치열한 연기 앙상블이 극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2022년 공개 당시, 이주영 감독과 쿠팡플레이 측이 ‘8부작 vs 6부작’ 편집권을 두고 매서운 법적 공방을 벌였던 논란의 작이라는 점이다. 1·2심 모두 쿠팡플레이 측의 승소로 일단락되었으나, 잡음이 묻은 작품의 파격 편성 강행은 그만큼 벼랑 끝에 몰린 지상파의 현실과 작품 자체의 묵직한 화제성을 동시에 방증한다.
‘신작 대신 검증된 구작’… 제작비 위기가 낳은 씁쓸한 상생
MBC의 이번 ‘안나’ 편성은 방송가가 생존을 위해 내세운 ‘OTT 시너지 모델’의 가장 극적인 성공 사례다.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드라마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 지상파 방송사들은 신작 제작을 줄이는 대신, 이미 완성도와 흥행성이 검증된 OTT 오리지널 콘텐츠를 수급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틀었다.
MBC는 앞서 2024년 디즈니+ ‘무빙’을 시작으로 ‘카지노 시즌2’, ‘킬러들의 쇼핑몰’ 등을 잇달아 브라운관에 선보이며 안방극장을 OTT 대작들의 ‘재활용 창구’이자 ‘상생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방송사 입장에서는 제작비 상승의 부담을 덜고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하며, OTT 측은 구작의 생명력을 연장하는 완벽한 윈윈 구조다. 하지만 수백억을 들인 특선영화보다 4년 전 OTT 구작이 두 배 이상의 성적을 내는 이 기묘한 현상은, 제작비 위기에 처한 K-콘텐츠 시장의 씁쓸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나’의 5.2%가 쏘아 올린 나비효과가 지상파와 OTT의 경계를 어디까지 무너뜨릴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