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흥행 고지에 오른 영화의 주연 배우가 한 해의 성취를 축하하는 가장 영예로운 시상식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배우 유해진이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제35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의 손에는 트로피가 쥐어지지 못했다.
1693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관객을 동원한 대작의 주역이 시상식에 불참해야만 했던 작금의 상황은 한국 대중문화계에 깊은 씁쓸함과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해진은 ‘왕과 사는 남자’에서 폐위된 단종을 보살피는 촌장 엄흥도 역을 맡아 그야말로 압도적인 열연을 선보였다. 이번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부문에는 구교환, 이병헌, 박지훈, 조인성 등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쟁쟁한 배우들이 후보로 올라 치열한 경쟁을 펼쳤으나, 심사위원들의 최종 선택은 유해진이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이미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 디렉터스컷 어워즈 남자배우상, 황금촬영상 남우주연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며 대한민국 최고 배우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특히 개인 통산 다섯 번째 천만 영화를 탄생시키며 명실상부한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이기에 이번 수상의 의미는 남달랐다.
하지만 지난 7일 부산 해운대구 시그니엘 부산 그랜드볼룸에서 화려하게 막을 올린 제35회 부일영화상 시상식에서 그의 빈자리는 유독 컸다. 유해진을 대신해 무대에 오른 제작사 온다웍스의 임은정 대표는 “유해진 배우가 촬영 일정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며 대리 수상을 진행했다. 공식적으로 밝힌 불참 사유는 촬영 일정이지만, 그 이면에는 그가 최근 출연한 영화 ‘암살자(들)’을 둘러싼 거센 정치·사회적 논란과 협박이 도사리고 있음을 대중문화계 안팎의 모두가 알고 있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삼아 영화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영화 개봉 이후 일부 설정을 두고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졌고, 놀랍게도 이 논쟁은 영화라는 창작물을 넘어 주연 배우를 향한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으로 뻗어나갔다. 지난 4일에는 일부 극우 성향 시민단체 회원 등 50여 명이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유해진의 단독주택 자택 앞에서 집회를 열고 영화 상영 중단과 배우의 사과를 촉구했다.
온라인 공간의 마녀사냥 역시 도를 넘었다. 유해진을 겨냥한 협박성 발언이 쏟아지는가 하면, 그가 모델로 활동 중인 버거킹 광고 영상에는 비난 댓글이 폭주해 결국 댓글 기능이 차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유해진이 특정 정치적 성향을 띠는 작품에 주로 출연한다는 주장과 함께 “(얼굴이) 북한상”이라는 원색적인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아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급기야 배우의 사생활이 침해당하고 물리적인 신변 위협 우려까지 커지자, 서울 성북경찰서는 지난 6일 소속사의 신변보호 요청을 받아들여 긴급 안전조치에 착수했다. 유해진에게 긴급 신고용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자택 인근 순찰을 강화하며 112 시스템에 관련 내용을 등록하는 등, 대중 앞에서 서야 할 배우가 자신의 집 앞에서조차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참담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소속사 VAST엔터테인먼트는 허위 사실 유포와 악의적인 인신공격, 신변 위협 행위에 대해 엄중한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또한 경찰에 엄정한 법 집행을 강력히 요청했다.
대중문화전문기자로서 수많은 영화계의 부침을 지켜봤지만, 이번 사태만큼 씁쓸함을 남긴 적이 없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상상력의 산물이며, 영화제는 다양한 시각을 포용하고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할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행사여야 한다. 영화의 소재나 설정에 대한 비판과 논쟁은 대중문화가 성숙해지는 과정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비판의 화살이 창작물과 배우 개인의 인격을 분리하지 못한 채 집 앞까지 찾아가 위협을 가하는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1693만 명이라는 전무후무한 관객을 매료시킨 ‘왕과 사는 남자’에서의 눈부신 성취는 유해진이 카메라 앞에서 쏟아부은 땀방울과 치열한 연기 혼의 결정체다. 그가 마땅히 서야 할 축제의 무대에 서지 못한 채 경찰의 스마트워치에 의지해야 하는 현실은, 우리 사회 일각의 편협함과 성숙하지 못한 문화 소비 의식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배우는 스크린 위에서 그저 연기로 말할 뿐이다. 관객에게 환희와 감동을 선사한 명품 배우가 이념의 잣대와 폭력적인 마녀사냥에 갇혀 무대에 오르지 못한 제35회 부일영화상의 빈자리는 한국 대중문화사에 뼈아픈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이 비정상적인 혐오가 하루빨리 멈추고, 온전한 ‘배우 유해진’으로서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다시 받는 날이 오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