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자의 작품·연출관은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드라마, 예능 모두 마찬가지죠. 알아두면 이해와 선택에 도움이 되는 연출자의 작품 세계. 지금부터 ‘디렉토리’가 힌트를 드릴게요. 1997년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한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시간을 뛰어넘고 계절을 오간다. 그 사이를 거니는 인물의 미세한 감정 포착은 보는 것만으로 먹먹하고 애잔하다.
생과 죽음, 사랑과 이별, 만남과 헤어짐을 형상화하는 데 조금의 과함도 없이 담백한 영화를 만드는 허진호 감독이다.
허진호 감독=천정환 기자
◇ 죽음의 무게를 이기는 사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 허진호 감독의 장편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인생작으로 꼽히는 멜로영화다.
동네 작은 사진관의 사진사 정원(한석규 분)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덤덤히 살아가는 정원의 일상에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 분)이 불쑥 나타난다. 두 사람은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간격을 좁히고 서로를 향한 마음을 조금씩 키워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멜로 장르이면서도 ‘사랑해’를 남발하지 않고, 와락 껴안고 입을 맞추는 영화는 아니다. 죽음을 앞둔 정원의 처지와 가까운 듯 멀게 느껴지는 그를 지켜보는 다림은 퍽 사려 깊다. 카메라도 인물의 사려깊음을 배려한다. 마치 정원이 찍는 사진처럼 영화 대부분은 정사진의 이미지로 일관되며, 카메라가 격정적으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한 명을 찍고 다른 한 명을 찍는 보편적 방식보다 한 프레임 안에 두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이어간다. 꼭 한 장의 사진 같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 사진=싸이더스 픽쳐스
조심스러운 카메라의 접근은 꼭 정원과 다림의 사랑과 닮았다. 영화 말미 정원이 갑작스럽게 구급차에 실려 가는 씬에서도 카메라는 상황의 긴박함을 전하는 데 몰두하지 않는다. 그저 정원의 집 담 너머에서 관조하듯 응시해 감정의 과잉을 경계한다. 러닝타임 97분 동안 이 영화가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일상, 시간, 계절에 대한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묘사 때문이다. 일상을 로맨스의 장치로 만드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 본질적인 감정 앞에 선 인간의 일상을 세밀히 포착해낸 ‘8월의 크리스마스’다.
영화 ‘봄날은 간다’ 포스터 사진=싸이더스 픽쳐스
◇ 계절의 변화와 함께 변한 사랑 ‘봄날은 간다’(2001) ‘8월의 크리스마스’ 성공 이후 허진호 감독이 두 번째 연출한 장편영화 ‘봄날은 간다’는 그에게 ‘멜로영화 장인’ 수식어가 붙는 데 쐐기를 박는 작품이다.
‘봄날은 간다’의 사운드 엔지니어 상우(유지태 분)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산다. 어느 겨울 지역 방송국 라디오 PD 은수(이영애 분)를 만난 상우는 그와 함께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 틀어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위해 녹음 여행을 떠난다.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상우는 은수에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든다.
그러나 너무 쉽고 빠르게 사랑에 빠진 탓인지 봄을 지나 여름에 도착한 그때 이들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엇갈린다. 상우는 자신의 집에 은수를 소개하고 싶어 하지만 이혼을 경험한 은수는 난색하고, 서로에 대한 목표가 다른 두 사람은 싸움과 만남, 미련과 집착을 반복한다.
‘봄날은 간다’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에 놓인 남녀가 겪는 심리에 대한 공감이 상당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어느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은수를 잊지 못하고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상우, 그런 상우에게 뒤늦게 찾아오는 은수. 계절이 변하며 자연스레 마음도 변했지만 허진호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며 아이러니조차 소중히 다뤘다.
영화 ‘선물’ 포스터 사진=제일기획, 영화사 호필름
◇ 허진호 감독의 첫 코미디 영화 ‘선물’ 멜로 거장 허진호 감독이 배우 신하균의 손을 잡고 코미디 영화 ‘선물’로 돌아왔다.
‘선물’은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모인 패기 만렙 청춘들 앞에 과거에서 온 수상한 남자가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유쾌 발랄 코미디이자 허진호 감독이 처음으로 타임슬립 소재로 만든 영화다. 당초 공개일은 17일이었지만 故 설리 비보에 공개를 연기했다.
창업준비생 하늘과 보라는 수없는 도전 끝 소방용 열화상 카메라 개발에 실패하고 밀린 월세에 작업실까지 빼야 할 상황에 마주한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게 한계라는 생각이 든 그때, 작업실 한가운데 수상한 남자가 나타나 “여기는 나의 공장”이라고 우긴다. 시간을 초월한 세 사람은 수상한 협동으로 친구가 되고, 이들의 시간은 특별함 자체가 된다.
‘멜로 이퀄 허진호’라는 공식을 완성한 허진호 감독의 첫 코미디는 과연 어떤 매력으로 꽁꽁 뭉쳤을지 기대가 높아진다. sunset@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