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전천후 명배우로 활약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한 이정은을 빼고 영화계와 방송계를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거다. 연말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까지, 우직하게 걸어온 그가 스스로 올 한 해를 돌아봤다.
지난달 종영한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극본 임상춘, 연출 차영훈)은 세상의 편견에 갇혀버린 동백(공효진 분)과 그런 동백의 진가를 알아본 용식(강하늘 분)의 이야기를 담았다. 로맨스 드라마에 스릴러 장르가 더해져 흥미를 돋우고 저마다 사연을 가진 인물들의 조합으로 따뜻하고 성숙한 드라마로 자리, 이견 없는 호평을 받았다. 이정은은 극중 동백의 엄마 정숙 역을 맡아 극 중후반부터 서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자극하는 그의 연기에 많은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보는 듯 정숙에게 품을 내줬다.
“올해는 내 인생의 완전한 황금기다. 이런 시기가 없었다. ‘기생충’(감독 봉준호)부터 ‘동백꽃 필 무렵’까지 흥행도 되고 참 좋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운 있는 사람 옆에 있는 게 좋다’라는 말이다. 올해는 운 좋게도 제가 운이 있는 분들 옆에 있었다.”
이정은의 등장은 ‘동백꽃 필 무렵’에 환기를 일으켰다. 엄마의 등장에 동백이 변했고,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호시탐탐 동백을 노리는 까불이를 저지하기 위한 정숙의 분투는 드라마에 스릴러 요소를 확실히 심었고 한편으로는 모성애라는 큰 주제를 부각시켰다. 이정은은 자신이 그린 정숙의 모습에 실제 어머니의 모습이 투영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정숙에게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 있을 거다. 우리 엄마 덕으로 내가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나는 늘 바쁘다고 밖으로 돌았다. 이번엔 가족들끼리 여행이라도 가려고 계획했다. 탕아가 돌아온 기분이랄까. 엄마의 냉정한 조언이 나를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임상춘 작가가 정숙의 다큐를 기가 막히게 잘 써준 덕도 봤다. 연기할 때도 웃기는 장면은 충분히 웃기고 슬픈 장면은 덤덤하게 하자고 생각했다. 어처구니없이 우는 모습이 서민적이라 시청자들도 좋아한 게 아닐까.”
이정은은 이번에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공효진을 천재적인 배우라고 말한다. 강하늘은 만약 딸이 있다면 사위 삼고 싶을 정도로 선하단다. 함께 작품에 출연한 배우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정은의 눈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빛난다.
배우 이정은이 MK스포츠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천정환 기자
“그녀(공효진)는 굉장히 건강하고, 중심에 서는 파워가 있다. 연기는 물처럼 흐른다. 천재적인 배우다. 사람들이 왜 ‘공효진, 공효진’하는지 알겠더라. 강하늘은 거짓말 아니냐고 할 정도로 선하다. 마음 같아선 사위 삼고 싶다.(웃음) 군대 다녀오니 변했다는데, 능글맞고 비위 잘 맞추는 모습에 새삼 놀라기도 했다. 필구를 연기한 김강훈도 천재가 아닐까 싶다. 시청자를 웃기고 울리는 대단한 배우다. 좋은 나무가 될 거다.” ‘동백꽃 필 무렵’에는 여러 인생사가 녹아있다. 미혼모, 자식만 보고 살아온 엄마, 어쩔 수 없이 강해져야 하는 초등학생, 치매 부모, 사이코패스 아들과 사는 아버지, 바람난 남편을 둔 아내,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은 남편, 동생과 함께 살고 싶은 외톨이 누나. 참 많은 인생이 담겨 있다. 이정은이 짚은 ‘동백꽃 필 무렵’의 의미도 거기에 있다. 타인에게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말 것.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할 지점을 이정은이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책임져야 하는 것 혹은 무언가를 버린다는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이번 드라마를 찍기 전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저 역시 손가락질 하며 타인의 인륜지사를 마음대로 말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에게 숨은 역사는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말자. 누군가 위기에 놓였다면 우리가, 사회가 나서서 도와줘야 한다. 임상춘 작가도 불행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동백꽃 필 무렵’을 쓴 거라고 생각한다.”
배우 이정은이 MK스포츠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천정환 기자
12월인 현 시점에서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 이정은이 없던 순간이 없었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은 물론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OCN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동백꽃 필 무렵’까지 그 어느 때보다 대중과 활발히 소통했다. 1991년 연극 ‘한여름밤의 꿈’으로 데뷔한 후 처음이다시피 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이정은의 요즘 마음은 어떨까. “지금이 딱 좋은 것 같다. 얄팍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자만했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집에는 상패가 없다. 어머니 댁에 둔다. 뭐랄까, 스스로의 업적을 보면 간사해질 것 같고, 대본 앞에 상을 두면 부담된달까. 그냥 이 일이 내 운명처럼 느껴진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별 잡념 없이 연기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다. 나는 여전히 자그마한 집에 자그맣게 살고 있다. 여전히 강아지들과 산책하는 게 가장 즐겁고 그렇다.” / sunset@mkcultu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