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여성 가수를 추천하는 게 참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채윤 언니가 ‘어차피 다른 회사 갈 바에는 우리 회사로 와라. 대표님이 너무 좋고 탄탄하다’며 적극적으로 손을 잡아줬어요.”
최근 트롯 매니지먼트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제이제이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바로 지난 29일 1년 반 만의 신곡 ‘내 인생 꽃이 피었다’를 세상에 내놓은 가수 마이진(본명 김화진)을 만났다. 트레이드마크인 칼날 같은 숏컷 헤어스타일에 당당한 바지 슈트 차림으로 마주한 그녀의 미소에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마이진의 이번 새 출발은 그녀의 인생만큼이나 극적이다. 나상도, 채윤 등 오랜 동료들이 기꺼이 재계약을 맺는 끈끈한 의리에 반해 선택한 소속사, 그리고 마침내 ‘내 인생에 꽃이 피었다’고 노래하는 오늘이 오기까지, 마이진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마이너’의 성장 드라마였다.
“싸우는 게 너무 싫었던” 태권도 겨루기 선수, 6mm 삭발 반항아의 반전
마이진은 본래 4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 고등학교 시절 정식 겨루기 선수로 활약하고 대학까지 태권도 전공으로 진학했던 유망한 체육인이었다. 날아다니는 시범단과 달리, 사각경기장 위에서 상대와 몸을 부딪쳐 이겨야 하는 겨루기 선수였던 그녀에게 운동은 늘 심리적 고통이었다.
“저는 그냥 운동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상대를 때려눕혀야 내가 사는 겨루기는 성향에 맞지 않았어요. 시합장에만 나가면 ‘내가 잘못 때려서 저 친구가 크게 다치거나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심리적 불안감 때문에 온몸이 굳어버렸죠. 연습 땐 코치님들이 기대를 가득 품으실 만큼 날아다녔는데, 정작 경기장만 가면 얼어버려 늘 답답해하셨어요.”
규율이 엄격했던 운동선수 시절, 머리숱이 많아 조금만 길어도 “머리 자르고 와라”라며 트집을 잡던 코치님에게 반항해 미용실로 가 “스님처럼 밀어달라”고 소리쳤던 유쾌한 일화도 털어놓았다.
“원장님이 그래도 여자애 머리를 어떻게 미느냐며 말리셔서 결국 6mm로 바짝 밀고 학교에 갔어요. 다음 날 교감 선생님께 손 붙잡혀 교무실로 끌려가 혼이 났죠. 머리를 조금만 길러도 답답해서 지금도 이 숏컷 스타일을 고수하고 치마는 태생적으로 불편해 입지 못해요.”
축제 날 찾아온 운명적 ‘용트름’... “고생했다. 조심히 올라와”
운동이 너무나도 싫어 탈출구를 찾던 대학교 1학년 시절, 마이진은 부모님과 무모한 내기를 걸었다.
“금메달을 따면 합법적으로 운동을 그만두겠다”는 합의였다. 믿을 수 없게도 악과 깡으로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덜컥 금메달 2개를 거머쥐었고, 마침내 약속된 자유가 주어졌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순간은 그 직후 대학 축제 무대였다. 친구들의 성화에 등 떠밀려 올라간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한 순간,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율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밑에서 환호해 주시는 관객들의 열기를 마주하는데,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트름이 꿈틀대며 쫙 올라오는 듯한 심장의 희열을 온몸으로 느꼈어요.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부모님과 상의 한 마디 없이 곧장 학교에 가서 자퇴서를 제출해 버렸죠.”
난생처음 부모님 속을 뒤집어놓는 큰일을 치르고 두려운 마음으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던 순간을 마이진은 여전히 잊지 못한다. 중학생 때부터 가수의 꿈을 몰래 응원하며 함께 오디션을 다녀주었던 어머니는 수화기 너머로 화를 내는 대신 나지막이 읊조렸다.
“고생했다. 조심히 올라와.”
24시 식당 밤샘 일부터 카바레 4년... “진짜 마이너가 다진 보컬 근육”
자퇴 이후의 삶은 혹독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24시간 식당에서 밤새 서빙을 하고, 아침부터 낮까지는 태권도 사범 알바를 뛰었으며, 저녁에는 호프집에서 맥주를 나르며 전국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우연히 식당 단골이었던 무명 가수의 권유로 라이브 카페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록 발라드 곡을 준비해 갔던 마이진에게 관계자는 “트로트를 해보라”고 주문했다.
“그때만 해도 어린 나이에 트로트는 싸구려 노래, 저급한 장르라는 편견이 있어 반짝이 옷을 입는 게 죽기보다 싫었지만, 시키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부른 게 김수희 선배님의 ‘애모’였어요. 그 노래 한 곡으로 덜컥 종로 예술단 단장님과 인연이 닿아 군부대와 고사 공연을 다니는 마이너 가수의 길로 들어섰죠.”
그녀는 트롯계에서 스스로를 “카바레 무대의 마지막 막차를 탄 세대”라고 자부한다. 20대 중후반에 카바레에서 무려 4년간 일수 찍듯이 매일 노래를 불렀다. 한 달 내내 30일을 꼬박 개근해야 겨우 60만 원(하루 일당 2만 원 꼴)을 손에 쥐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힘들지 않았냐고요? 전혀요. 카바레 무대는 기계 MR 반주가 아니라 드럼, 색소폰, 피아노, 기타가 라이브로 연주하는 ‘리얼 세션 사운드’거든요. 그 생생한 사운드가 무대 위 제 심장을 미친 듯이 바운스하게 만들었어요. 질척대는 손님들에겐 단호하게 대처했고, 웨이터 이모와 삼촌들이 저를 자식처럼 든든하게 지켜주셔서 상처받지 않고 무대 위에서 소리를 내지르는 법을 온몸으로 배울 수 있었죠”
이후 마이진은 한국가수협회 사무실에서 원로 선배들에게 커피를 타 드리고 청소를 도맡아 하는 잡일을 하며 버텼다. 이 성실함을 눈여겨본 대선배 자니리 선생님의 추천으로 난생처음 TV 방송 가요 무대에 섰고, 전설적인 가수 김부자 선생님의 일일 매니저를 자처해 직접 운전대를 잡고 가요무대 대기실의 공기와 대가들의 숨소리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선배님들의 의상을 들고 가요무대 대기실 구석에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어요. ‘지금은 비록 내가 이 냄새만 맡고 있지만, 언젠가 꼭 나도 저 무대에 우뚝 서서 이 열기를 뿜어내리라’ 하고 매일 밤 다짐했죠.”
마침내 첫 정식 계약을 맺고 비상을 꿈꾸던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의 시련이 연달아 찾아왔다. 계약하자마자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터졌고, 이어서 태풍이 한반도를 쓸었으며, 곧바로 4년간 전 세계를 마비시킨 코로나19 대유행이 찾아와 예약된 모든 행사가 와르르 취소된 것이다.
“4~5년 동안 꼼짝없이 손발이 묶였어요. 하지만 그 시련이 결국 저를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이끌었죠. 치마를 입고 예쁘게 꾸며야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섭외 제안은 거절했지만, 운동선수 출신으로서 ‘전국체전’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쏙 와닿았던 ‘트롯 전국체전’에 나가 올스타를 받으며 비로소 세상에 ‘가수 마이진’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