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의 공연을 상징하는 거대한 수식어 하나를 꼽자면 단연 ‘웅장한 풀 오케스트라’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콘서트 <오래된 노래>에서 그는 데뷔 이래 처음으로 이 강력한 무기를 과감히 내려놓았다.
스스로 “칼이나 방패 없이 전장에 나가는 기분”이라 칭했던 이 파격적인 실험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목소리가 지닌 본연의 밀도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율밴’의 저력을 가장 투명하게 증명해 낸 무대가 되었다.
공연의 포문은 예상을 깬 파격 그 자체였다. 언제나 극장 공연의 첫 곡으로 쓰이던 ‘그림자’ 대신, 오직 피아노 한 대와 김동률의 목소리만으로 채워진 ‘겨울잠’이 세종문화회관의 공기를 갈랐다. 무대 깊은 곳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긴장감 속에서 터져 나온 그의 저음은 그 어떤 대편성 반주보다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이어진 ‘그림자’에서는 일렉트릭 기타 대신 일렉트릭 바이올린(조아라)이 간주 솔로를 맡으며 신선한 변주를 꾀했고, 공연의 타이틀곡 ‘오래된 노래’는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의 3중주로 소박하게 편곡되어 곡 특유의 정서를 극대화했다. 이소라에게 주었던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는 피아노 대신 어쿠스틱 기타(김동민)의 선율에 얹어 불렀으며, 보아와 알렉스에게 주었던 ‘같은 꿈’은 브라스와 코러스를 덧입혀 풍성하게 소화해 냈다.
특히 오케스트라가 빠진 자리를 빈틈없이 메운 ‘율밴’ 멤버들의 멀티플레이는 이번 공연의 백미였다. 연주자 한 명 한 명의 기량을 한껏 끌어올린 치밀한 편곡이 빛을 발했다. 트럼펫 연주자 조정현이 ‘출발’의 전주 휘슬 파트를 훌륭하게 소화해 낸 대목 역시 밴드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화려한 LED와 디지털 영상이 범람하는 요즘 공연계에서, 김동률은 음악의 결에 맞춘 아날로그 연출을 택했다. ‘여름의 끝자락’ 무대에서는 흔한 영상 대신 광목 재질의 합판을 세워 아날로그적인 질감을 살렸고, 피아노 연주(정동환)와 함께 푸른 청보리밭 세트에 물결 효과를 만들어 내며 한 소년이 나무 그늘 아래 누워 낮잠을 자는 듯한 심상을 무대 위에 완벽히 구현해 냈다.
곡이 끝나고 암전이 된 후 ‘Moonlight’ 전주와 함께 무대의 조명이 낮에서 밤으로 전환되는 연출은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또한 ‘오래된 노래’와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에서는 무대 세트와 바닥에 나무 그림자 프로젝션을 비추어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깊이를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화려함 대신 정서를 택한 무대 미술은 음악이 지닌 온기를 시각적으로 증폭시키는 데 성공했다.
음악 앞에서는 한없이 진지한 완벽주의자지만, 멘트를 할 때만큼은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김동률 특유의 위트도 여전했다. “봄에 심심해서 가을에 공연이나 해볼까 했다”며 농담을 던지다 이내 “실은 2년 전 ‘산책’ 공연 때부터 기획했던 것”이라며 속내를 털어놓았고, “오케스트라 없앤다고 하면 ‘이제 안 되나 보다’ 오해할까 봐 서둘렀다”며 웃음을 안겼다.
팬들의 ‘소극장 공연’ 요청에 대해서는 “지금 소극장 공연을 한다고 하면 (티켓팅 때문에) 많은 분들이 화를 내실 것 같다. 아직 자신이 없어 먼 버킷리스트로 남겨두겠다”며 현실적인 핑계로 영리하게 빠져나갔다. 또한 신나는 곡에서 일어날까 말까 내적 갈등을 겪는 관객들을 향해 “다리도 안 되고 힘드시니 그냥 앉아서 신나게 박수 쳐 주시면 된다”며 중견 가수와 팬덤이 함께 나이 들어가는 유대감을 재치 있게 풀어냈다. 오케스트라가 없는 대신 밴드 연주자들을 최대한 활용했다며 “있는 대로 뽕을 뽑는다”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서는 베테랑다운 여유가 묻어났다.
“우리 조금만 더 늙어서 만나요”라는 그의 마지막 인사는 오랜 여운을 남겼다. 7년 만에 세종문화회관으로 돌아온 2026년의 김동률은, 자신의 가장 거대한 무기였던 오케스트라를 내려놓고도 기어이 관객의 마음을 빈틈없이 채워냈다. 화려한 포장지를 벗겨낸 자리에는 가장 김동률다운 낭만과 집요함, 그리고 묵직한 진심이 남아있었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