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오전 7시 현대해상 광화문 사옥. 1951년생 올해로 74세인 권오갑 HD 현대 명예회장 겸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가 몸을 풀고 있었다. 오전 8시 시작하는 ‘2025 MBN 서울마라톤’ 하프코스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권 회장이 창밖을 내다보며 미소 지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많이 뛰는 것 같아. 10년 전만 해도 산책하는 사람이 러닝하는 사람보다 많았거든. 지금은 어딜 가나 다 러닝이야. 더 많은 사람이 뛰었으면 좋겠어. 세상에 마라톤만큼 정직한 게 없거든.”
‘MK스포츠’가 16일 오전 ‘2025 MBN 서울마라톤’ 하프코스 도전을 준비 중이던 권 회장과 나눈 이야기다.
Q. 춥진 않습니까.
뛰면 더워질 건데 뭐(웃음). 누가 내게 그랬어요. “마라톤은 짧은 바지 입고, 안경, 모자 쓰지 말고 뛰라”고.
Q. 평소에도 잘 뛰시고, 마라톤에도 꾸준히 도전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년에 한 4개 대회 정도 뛰지. 해병대에서 제일 많이 하는 훈련이 구보야. 근데 나는 잘 못 뛰었지. 동기생들한테 정말 미안했습니다. 80명이 뛰면 내가 50등 정도 했으니까. 운동선수도 많았어요. 국가대표급도 3명 있었을 거야. 운동선수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는 걸 그때 느꼈지.
Q. 러닝이 취미였을 것 같진 않습니다.
제대한 뒤에도 러닝 생각이 났어요. 좀 잘 뛰고 싶더라고. 꾸준히 뛰면서 마라톤에 출전했지. 지금은 어떤지 알아요? 지금도 뛰는 사람은 나 하나야(웃음). ‘다 같이 뛰자’고 해도 못 뛰어. 나만 뜁니다.
Q. 마라톤 전날 잠은 잘 주무십니까.
항상 설쳐요. ‘잘 뛸 수 있을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죠. 뒤척뒤척하는데, 그래도 이건 설렘이니까. 나쁜 고민이 아니잖아. 나는 아직도 마라톤 전날의 설렘이 아주 좋습니다.
Q. 어떤 설렘인 겁니까.
내가 ‘완주할 수 있을까’, ‘기록을 단축할 수 있을까’ 등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가슴이 뛰어요. 빨리 뛰고 싶은 마음이 커지죠. 나는 마라톤 대회 2주 전부터 준비 강도를 높입니다. 우선, 먹는 걸 줄여요. 채소를 더 많이 먹고요. 2주 동안은 술도 안 마셔요. 평소 저녁 약속이 많거든. 사람들한테 ‘나 마라톤 나가’라고 하면 이해해 줍니다(웃음).
Q. 달릴 때 어떤 감정을 느낍니까.
무슨 감정을 느껴(웃음). 아무 생각도 안 해. 나는 그게 좋더라고. 달리면 힘들잖아요. 머릿속이 싹 비워집니다. 아무 생각 안 하고 뛰는 것에만 집중하는 거지. 그 어떤 잡념이 있더라도 한강 나와서 뛰면 머릿속이 맑아져요. 뛰고 나면 땀도 나고, 정신이 더 맑아지는 느낌도 듭니다. 아주 좋아요.
Q. 연맹 총재와 학교 재단도 맡고 계시잖아요. 회사 일에 연맹 일도 처리해야 하는 등 쉴 틈이 없을 것 같은데요.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뛴다는 건 대단한 일 아닙니까.
에이. 아닙니다. 근무시간엔 회사 일에 집중해요. 점심, 저녁엔 약속이 많은 편입니다. 업무의 연장선상이죠. 주말엔 K리그를 즐깁니다. 그런데 총재 일이 그렇게 많진 않아요. 왜인지 아세요?
Q. 글쎄요.
내 좌우명이 ‘정직’과 ‘성실’입니다. 나는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한테 일을 맡겨요.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란 확신이 생길 때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보통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내거든. 물론, 일머리가 있으면 더 좋지. 그런데 정직하고 성실하기만 해도 보통 이상은 합니다. 리더는 그런 사람을 찾아서 일을 맡겨주는 이예요. 나는 맡기면 끝입니다.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아. 믿고 기다리지.
Q. 회장이나 총재가 맡기는 일이라면, 그 중요성이 대단히 클 겁니다. 그런 일을 아랫사람에게 맡기고 묵묵히 기다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요.
인내가 필요하죠. 저라고 말하고 싶은 게 없겠습니까. 하지만, 꾹 참아요. 거기서 토를 달면 일이 더 안 돼요. 왜냐. 리더가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아랫사람은 능력 발휘를 못 하거든. 통이 큰 사람도 확 좁아지는 겁니다. 사람을 키우려면, 자기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내 기준에 맞추면, 한계가 있는 사람밖에 안 됩니다.
Q.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게 무엇입니까.
나는 앞서서도 말한 딱 두 개만 봐요. 정직과 성실입니다. 내가 마라톤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뭔지 알아요? 마라톤은 정직한 스포츠입니다. 내가 뛰는 만큼 성적이 나와요. 이걸 누가 대신 뛰어줄 순 없잖아요. 나는 정직하고 언행일치하는 사람을 신뢰하고 좋아합니다.
Q. 정직과 성실, 당연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지켜나가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내가 1978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이유는 정주영 창업자께서 학연, 지연 안 따지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 잘하는 직원을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이예요. 말단 사원으로 시작했지만, 열심히 살았어요.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했습니다. 살면서 지각이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Q. 정직과 성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증명해 주셨네요.
우리가 많이 아는 박지성, 이영표도 그렇지 않나.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 한·일 월드컵 끝나고 왜 박지성, 이영표를 데리고 갔겠어요. 나는 제일 먼저 본 게 ‘성실함’이라고 봐요. 솔직히 말해서 히딩크 감독 오기 전 박지성, 이영표 어땠습니까. 그 시절만 해도 대학 간판 많이 보던 때잖아요. 히딩크 감독에게 이 둘을 왜 선발했냐고 물어보니 그들의 성실함이 자기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하더라구요. 이야기하다 보니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네요.
Q. 무엇입니까.
배려심. 우린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잖아요. 일을 혼자서 하지도 않고요.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면, 간판만 가지고 있어도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걸 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중 다수가 교만해요. 상대를 무시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성실하고 겸손할 수 없어요. 상대를 존중할 때 우린 비로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게 돼요. 기본 중의 기본 같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Q. 권오갑 회장은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그룹을 대표하고, 명예회장으로까지 추대된 인물입니다. 재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이자 흔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던데요. 평생 초심을 잃지 않을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간단해요.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모두가 나보다 뛰어났기 때문에서 나는 더 열심히 했어야 했어요. 다 쏟아낼 수 밖에 없는거죠. 저는 실제로 그렇게 느끼면서 살아요. 내 주변엔 늘 나보다 부족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요. 성실, 정직, 배려, 겸손 이런 기본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진짜 강한 사람은 기본에 충실해요.
Q. 권오갑 회장의 꿈은 무엇입니까.
나는 대한민국이 잘 됐으면 좋겠어. 우리 HD현대가 잘 됐으면 좋겠고. 내 가족이 잘 됐으면 좋겠다(웃음).
Q. ‘잘 된다’라는 게 어떤 뜻입니까.
간단해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최소한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구요. 우리가 사는 사회도 경쟁이 치열하잖아요. 저도 얼마나 많은 경쟁을 치르면서 살아왔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회사에서 14번 진급했거든. 지금 돌아봐도 부끄러운 행동은 안하려고 노력했어요. 내 성공을 위해 아부한 적이 없고, 언제든 그럴 바엔 차라리 ‘회사를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만두면, 장사해서 성공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기본을 지키면서 살다 보니 운도 많이 따른 것 같네요.
Q. 권오갑 회장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축구 아닙니까. 축구 팬들에겐 축구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권오갑 회장의 인생에서 축구는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사실 축구를 잘 못했어요. 어릴 때 친구들과 축구하면 보통 몸으로 막는 역할이었어요. 그렇지만 정몽준 대주주와 인연을 맺고부터 33년째 축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KFA)과도 16년째 인연을 이어가면서 축구계의 궂은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제는 축구가 없는 날엔 금단 현상이 생길 정도예요.
Q. 금단 현상이요?
중계만 찾는 거지. 집에 있으면 K리그 경기만 보거든. 중계가 없는 날은 너무 허전합니다. K리그 26개 구단 모든 선수도 알고 있구요. 그 정도로 축구를 좋아합니다. 축구는 제 삶이고, 축구와 함께하게 되면서 가장 중요한 취미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Q. 한편의 인생 강의를 들은 것 같은 시간이었는데요. 마지막으로 권오갑 회장의 후배들, 특히 2030 젊은 세대에게 좀 더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요령 피우지 마세요(웃음). 다 보입니다. 정직하게 땀 흘리면서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고 하세요. 세상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지금은 요령 피우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정직해요. 어느 분야에서든 성공하는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광화문=이근승 MK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