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널 전체가 토트넘의 팬이 될 것이다.”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두고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바로 아스널의 리그 우승을 철천지 원수인 북런던 라이벌 토트넘이 키를 쥐고 있는 상황 때문이다.
아스널 선수들이 나서 토트넘의 팬임을 자처하며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아스널 팬들도 마찬가지로 토트넘의 핵심 공격수 손흥민을 응원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로 토트넘이 아스널의 우승경쟁팀인 맨체스터시티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아스널은 지난 13일 오전 10시 30분 영국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2023-24 프리미어리그(PL) 37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1-0으로 승리, 승점 86점을 기록하며 맨시티(승점 85점)를 제치고 다시 선두에 복귀했다.
아스널은 1경기를 더 치른 상태서 승점 1점을 앞서고 있는 상황으로 20일 자정 에버튼과 리그 최종전만을 남겨두고 있다. 현재로서 아스널의 리그 자력 우승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2경기를 남겨둔 맨시티가 최소 1경기서 무승부 또는 패배하기를 바라야 한다. 혹은 아스널이 에버튼전서 패하고, 맨시티가 남은 2경기서 모두 패하는 상황이 나와도 극적으로 우승할 수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확률이 낮은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아스널이 최종전 에버튼전까지 승리한다는 가정하에 맨시티가 승점을 잃을 것을 가장 기대할 수 있는 경기는 바로 토트넘전이 될 수 있다. 당장 오는 15일 새벽 4시 열리는 토트넘과의 경기서 맨시티가 만약 무승부를 거둔다면, 최종전 종료 시 승점이 89점으로 같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득실차에서 3골을 앞서고 있는 아스널이 더 유리한 상황이다. 혹시라도 이 경기서 토트넘이 맨시티를 상대로 승리한다면 아스널은 최종전서 에버튼을 꺾는 것만으로 자력 우승을 확정할 수 있다.
아스널의 입장에선 지난 시즌에도 맨시티와 시즌 후반까지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치다 막바지 미끄러지면서 승점 5점 차로 우승을 내준 바 있다. 올해는 그 차이를 더 좁혔지만 시즌 후반 더 완벽해지는 맨시티의 경기력 탓에 그들이 못하기 보다는 상대를 더 응원해야 할 처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다 보니 이젠 아스널 팬들이 북런던 라이벌로 철천지 원수인 토트넘과 토트넘 선수들을 응원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현지 팬들과 아스널의 공식 SNS 등에선 “나는 이제부터 손흥민을 응원하는 팬이 될 것”이라거나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스퍼스의 팬이 되어서 맨시티전 승리만을 기도하겠다”는 등의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영국 내에서도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으로 손꼽히는 양 팀의 오랜 기간의 악연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위해 아스널 팬들이 토트넘의 승리를 바라는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스널 선수들도 토트넘을 향한 공개지지에 나섰다. 올 시즌 아스널의 리그 최소실점(28실점) 짠물 수비를 이끌고 있는 프랑스 출신의 중앙 수비수 윌리엄 살리바는 토트넘을 응원하며 맨시티전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살리바는 “아스널 전체가 토트넘의 팬이 될 것이다. 우린 토트넘 승리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들에게 좋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며 그 경기를 볼 생각”이라며 “많은 토트넘 팬이 (아스널에게 어부지리를 주지 않기 위해 차라리) 맨시티를 상대로 승리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만, 토트넘이 승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아스널의 또 다른 런던 라이벌팀인 첼시에서 올 시즌을 앞두고 이적해 온 공격수 카이 하베르츠도 토트넘을 열렬히 응원하겠다고 했다. 하베르츠는 올 시즌 초 부진했지만 4월 치른 8경기에서만 4골 3도움을 기록하는 등 올해 들어 부활에 성공하며 49경기 13골 6도움으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다.
13일 경기 종료 후 하베르츠는 “하루만 난 토트넘의 가장 열렬한 팬이 될 것”이라며 “토트넘이 맨시티전에서 최선을 다해주길 바라고 있다. 그 경기서 최선의 결과(토트넘 승리)가 나오길 희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같은 하베르츠의 발언에 대해 아스널 팬들마저 동의하며 같은 기도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아스널 감독 부임 후 첫 우승 문턱에 선 미켈 아르테타 감독도 희망을 기대했다. 아르테타 감독은 “우리도 (토트넘이 맨시티를 상대로 승리, 혹은 무승부를 거두는) 결과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면서 “우리가 최종전에서 PL 우승이란 희망의 상자를 스스로 열고 싶다”며 최종전에서 맨시티에 승점이 앞선채로 자력 우승을 결정 짓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아스널과 맨시티의 리그 우승 경쟁은 최종전에서나 그 향방이 가려질 전망. 하지만 실질적으로 2023-24시즌 그 키를 쥐고 있는 건 토트넘이 될 전망이다.
토트넘의 입장에서도 맨시티전은 반드시 승리해야 할 상황이다. 현재 5위로 차기 시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주어지는 4위 내 진입 경쟁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토트넘의 입장에서도 14일 리그 4위 아스톤빌라가 리버풀과 3-3으로 무승부를 거두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남았다. 만약 패했다면 더 높은 가능성이 생겼겠지만 우선 승점 1점 추가에 그치면서 4위가 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살아 있게 된 것이다.
토트넘이 만약 맨시티를 꺾고 최종전서 리그 최하위로 강등이 확정된 셰필드 유나이티드마저 잡아내고 승점 6점을 추가하고, 아스톤 빌라가 최종전서 크리스탈팰리스에 패한다면 극적인 반전이 벌어진다. 물론 맨시티전을 포함한 2연승에 상대의 패배까지 나와야 하는 희박한 확률이지만 토트넘의 입장에선 맨시티전 승리부터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라이벌 팀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긴 싫지만 자신들의 기적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할 토트넘의 상황이다.
김원익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