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용 김천상무 감독의 선수 생활은 짧았다. 선수 정정용은 1992년 12월 실업팀이었던 이랜드 푸마(해체)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1997년까지 주장 완장을 달고 뛰었다. 정 감독은 젊은 나이인 29살에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연습 경기 중 불의의 부상을 당한 결과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두 가지가 있다. 정 감독은 선수 시절 프로를 경험하지 못했다. 한국 축구계에서 프로 경험이 없는 선수 출신이 지도자로 기회를 잡아내고, 성과까지 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두 번째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정 감독의 학구열이다. 정 감독은 선수 시절 구단의 허락을 받고 운동과 공부를 병행했다. 정 감독은 선수 시절 명지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체육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정 감독은 이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포츠 생리학 박사 과정까지 이수했다.
정 감독은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 정 감독은 축구인들에게 흔한 취미인 골프도 안 친다. 일과를 마치면, 지난 경기를 돌려보거나 유럽 선진 축구를 보면서 전술을 고민하는 게 정 감독의 취미다. 더 좋은 축구를 위한 고민이 정 감독에겐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보통의 한국 지도자는 유럽 축구를 잘 안 본다. 명확하게 표현하면, 큰 관심이 없다. 일반 팬도 다 아는 펩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 감독이나 위르겐 클롭 전 리버풀 감독을 아는 정도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통은 자신의 선수 시절 경험을 토대로 지도자 생활을 한다. 선수로 큰 성공을 이루었기에 그 경험에 크게 의존한다.
정 감독은 다르다. 지난해 10월 정 감독과 유럽 축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정 감독은 당시 두 지도자를 눈여겨봤다. 윌리엄 스틸(33·벨기에)과 키언 맥케나(39·북아일랜드)였다.
스틸은 프로 선수 출신 지도자가 아니다. 스틸은 아마추어 축구 팀에서만 뛰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축구 게임인 풋볼 매니저(FM)의 열광적인 팬으로 10대 때부터 지도자 경력을 쌓아 유럽 빅리그에서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다.
맥케나는 잉글랜드 3부 리그에 머물던 입스위치 타운을 맡아서 2년 만에 팀을 프리미어리그(EPL)로 끌어올렸던 인물이다. 맥케나는 북아일랜드 연령별 대표를 거칠 정도로 유능한 재능이었지만, 부상으로 프로에 데뷔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맥케나는 지도자 공부를 착실히 이어가면서 세계 최고 무대에서 경쟁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정 감독은 “과르디올라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인 지도자의 축구는 반드시 챙겨봐야 한다”며 “세계 축구 흐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들의 축구 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여기에 스틸이나 맥케나의 축구도 챙겨본다. 이런 감독들을 유심히 보면, 자신의 철학이 엄청나게 확고하다. 나는 선수 시절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지도자로 능력을 뽐내고 있는 사람들의 장점도 흡수하고 싶다” 고 했다.
정 감독은 2025시즌 국군체육부대 상무의 역사를 새로 썼다.
상무는 2011년부터 K리그에 참가하고 있다. 이때부터 2020시즌까진 상주를 연고로 하는 상주상무였다. 2021시즌부턴 김천을 연고로 하는 김천상무로 K리그에 참가 중이다. 정 감독은 상무 역사상 최초로 2시즌 연속 K리그1 파이널 A에 들었다. 특히, 2시즌 연속 상무의 역대 최고 성적인 K리그1 3위를 기록했다.
정 감독은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선수의 성장을 이끌어냈다. 정 감독은 박승욱, 김봉수, 서민우, 모재현 등이 처음 태극마크를 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 감독은 K리그1 정상급 공격 자원으로 평가받는 이동경의 장점을 극대화하면서 이동경의 2025시즌 K리그1 최우수선수상(MVP) 수상까지 이끌었다.
올 시즌 군 전역 후 제주 SK의 K리그1 잔류를 이끈 김승섭도 김천에서 큰 성장을 이룬 선수 중 한 명이다. 김승섭은 제주의 K리그1 잔류를 이끈 뒤 정 감독을 향해 감사 인사를 전했다.
김승섭은 “올 시즌 K리그1 베스트 11 수상을 기대했다”며 “상을 받으면 어떤 얘기를 할지 준비했었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적으로 정정용 감독님에 대한 많은 얘기를 준비했는데 이야기하지 못해 매우 아쉬웠다. 정정용 감독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정정용 감독님을 만나서 아주 많이 성장했고, 새로운 축구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김승섭은 ‘정정용 감독을 만나서 새롭게 배우게 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해달라’는 말엔 이렇게 답했다.
“군대 가기 전엔 측면 공격수로만 뛰었다. 예전엔 크게 벌려서 플레이하는 걸 좋아했다. 스피드란 강점이 뚜렷했다. 더 명확하게 말하면, 장점이 빠른 발 하나였다. 정정용 감독께 빌드업 축구가 무엇인지 배웠다. 측면 공격수가 안으로 좁혀 들어와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하프 스페이스, 포지셔닝, 위치 선정, 스위칭 플레이 등도 정정용 감독님을 만나서 배운 거다.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공간을 활용하는 법도 김천에서 익혔다. 정정용 감독님은 나를 더 좋은 선수로 만들어주셨다.”
정 감독이 서울 이랜드에서의 실패를 지도자로서 한 단계 도약의 계기로 삼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 감독은 대한축구협회(KFA) 전임 지도자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정 감독이 지도자로 빛을 본 건 U-20 대표팀을 이끌고 있던 2019년이었다. 정 감독이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때였다.
정 감독은 2019년 폴란드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 한국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한국이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에서 결승 무대를 밟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사례다.
정 감독은 이 대회에서 개인 능력이 특출 난 18살이던 이강인을 한국 선수 최초로 FIFA 주관 대회 MVP로 만들었다. 이강인이 이후 프로와 대표팀에서 자리 잡는 데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반 축구 팬도 명확하게 알고 있다. 정 감독이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하는데 얼마나 유능한 지도자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 감독이 지도자로 승승장구(乘勝長驅)만 했던 건 아니다. 정 감독은 U-20 월드컵 이후 이랜드를 맡아 뼈아픈 실패를 맛봤다. 정 감독은 큰 책임감을 안고 이랜드를 3시즌 동안 이끌었지만, K리그1 승격이란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올해 1월 정 감독을 만났을 때다.
정 감독은 이랜드 시절을 떠올리면서 “제일 아쉬운 건 인프라였다”며 “처음 이랜드를 맡았을 땐 제대로 된 훈련장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랜드 클럽하우스가 가평에 있다. 우리가 훈련하려면 효창운동장까지 이동해야 했다. 2시간 30분 이동해서 1시간 30분 운동하고 다시 2시간 30분을 이동했다. 또 효창구장은 인조 잔디다. 당시 코로나19까지 겹쳐서 훈련할 곳을 찾는 게 너무 힘들었다. 선수들이 정상 컨디션을 유지하기 매우 어려웠다. 구단에 바로 지원 요청을 했다. 이랜드에 3년 동안 있으면서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클럽하우스, 훈련장을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이라고 했다.
정 감독은 이랜드를 이끌면서 몇 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하곤 했다. 정 감독이 팀 분위기를 바꾸려면 자신이 나가야 한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정 감독은 “2년 차 땐 우리 코치(故 김희호)에게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팀 성적이 안 좋은 데다가 안타까운 일까지 겹친 거다. 그때도 책임을 지려고 했다. 구단에서 만류해 팀에 남았지만, 정말 힘들었다. 6개월 동안 약을 먹었다. 대상포진에 코로나19도 겹쳤다. 분위기가 완전히 가라앉아서 회복이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정 감독은 이어 “3년 차 땐 어떻게든 성적을 내보려고 했다. 회장님이 항상 믿어주셨다. 회장님이 늘 ‘끝까지 가보자’고 해주셨다.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기에서의 마무리가 늘 아쉬웠다. 시즌 초 좋았던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이 조금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고 했다.
정 감독은 이랜드에서의 실패에 주저앉지 않았다. 정 감독은 실패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은 보완하는 데 매진했다. 정 감독이 김천을 맡자마자 K리그2 정상에 오르고, K리그1에서 2시즌 연속 놀랄만한 성과를 낸 이유다.
정 감독이 한국 프로축구 최상위 리그인 K리그1에서 감독을 맡은 건 지난해가 처음이다. 선수단이 큰 폭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구단 특성까지 더해서 보면, 정 감독이 이룬 성과는 축구계에서 더 인정받아야 한다.
한국 축구계에선 선수 시절의 명성만으로 지도자 기회를 쉽게 잡는 걸 너무 흔하게 본다. 그 기회가 무제한인가 싶은 의구심이 드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지도자 정정용의 삶과 행보는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국가대표, 프로선수 출신이 아닌 정 감독의 성장 스토리에 더욱 눈이 가는 이유다.
[이근승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