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0일, MBC ‘쇼! 음악중심’ 생방송 무대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다.
2000년대 초반의 향수를 강렬하게 자극하는 경쾌한 전주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 마이크를 쥐고 무대 중앙에 섰다. 데뷔 28년 차를 맞은 대한민국 대표 배우, 하지원이었다.
그녀가 이날 선보인 곡은 지난 2003년 개봉한 영화 ‘역전에 산다’의 OST이자 가수 싸이가 작사·작곡해 화제를 모았던 ‘홈런’이다. 무려 23년 만에 음악방송에 소환된 그녀의 모습은, 주말 안방극장에 신선한 충격이자 유쾌한 청량감 그 자체였다.
이 파격적인 무대는 우연한 해프닝이 아니다. 최근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JTBC 디지털스튜디오의 웹예능 ‘26학번 지원이요’에서 비롯된 대중과의 소중한 약속이었다.
해당 콘텐츠에서 기안84와 강남은 “언젠가 전설의 ‘홈런’ 무대를 다시 해달라”며 유쾌한 도발을 던졌고, 하지원은 “영상 조회수가 120만을 넘으면 진짜로 재현하겠다”고 화답했다. 추억을 소환하고픈 대중의 염원이 모여 조회수는 순식간에 목표치를 돌파했고, 하지원은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증명했다.
누군가는 예능에서 지나가는 말로 던진 가벼운 공약이라 치부할 수도 있었다.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그리고 지상파 연기대상까지 휩쓸며 확고한 커리어를 가진 최정상의 배우가, 수십 년 전의 댄스곡을 들고 1020 아이돌들이 주름잡는 생방송 음악 프로그램에 서는 것은 자칫 ‘이미지 소모’로 읽힐 수 있는 리스크다.
하지만 하지원은 뱉은 말의 무게를 알았다. 기꺼이 땀 흘려 무대를 준비하고 당당히 카메라 앞에 선 그녀의 모습은, 톱스타의 진짜 품격이 ‘신비주의’가 아닌 ‘책임감’에서 나온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올해로 40대 후반(1978년생)에 접어든 그녀지만, 무대 위 하지원에게 세월의 더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2003년 당시의 싱그럽고 에너제틱한 안무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모습은 그 시절 추억을 공유하는 세대를 넘어, 젠지 세대들에게도 ‘힙한 자극’으로 다가갔다.
이러한 유연함은 최근 그녀의 행보 전체를 관통한다. ‘26학번 지원이요’에서는 2026학번 신입생으로 변신해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선배와 유쾌한 썸 콘셉트를 즐기고, 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이상화와 나이와 분야를 초월한 진한 우정을 다진다. 최근 SBS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했을 때는 “마지막 연애가 8년 전, 혹은 그보다 더 됐을 수도 있다”며 자신의 사생활을 가감 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권위의식이라는 무거운 갑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가장 낮은 자세로 대중의 놀이터에 뛰어들어 함께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문화계에서 연차가 쌓이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종종 스스로 선택지를 좁히는 핑계가 되곤 한다. 많은 이들이 실패하지 않을 안전하고 익숙한 길, 우아하고 흠잡을 데 없는 배역 뒤로 숨는 것을 공식처럼 여긴다. 하지만 하지원의 행보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궤도를 그리며 신선한 파장을 일으킨다.
그녀가 이번에 터뜨린 ‘홈런’은 단순히 이색적인 팬서비스 하나를 추가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젊음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니라, 새로운 것에 언제든 나를 던질 수 있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나이와 체면이라는 장벽에 갇혀 도전을 망설이는 많은 이들에게 건넨 통쾌한 ‘인생 홈런’인 셈이다.
늘 소년 같은 맑은 미소로 새로운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26학번 새내기’ 하지원. 약속을 지키기 위해 땀 흘리며 무대를 즐긴 그녀의 아름다운 용기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그녀가 들어설 다음 타석이 벌써부터 설레는 이유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