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혁의 야구인생은 상무 입대 전과 후로 나뉜다. 군복무 전까지는 평범한 선수였다. NC 다이노스에 입단해 첫 3시즌 동안 타율 0.207에 4홈런 OPS 0.567로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FA(프리에이전트) 손시헌이 합류한 뒤엔 대부분의 시간을 벤치와 2군에 머물렀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의 노진혁은 다른 선수가 됐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시즌 동안 타율 0.278에 67홈런 300타점 OPS 0.799로 공수를 겸비한 완전체 유격수로 변신했다. 이 기간 유격수 중에 노진혁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김하성(92개) 뿐이다. 김하성이 미국으로 떠난 뒤엔 야구팬 사이에서 ‘하없노왕(김하성 없으면 노진혁이 왕이야)’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인정받는 유격수가 됐다.
노진혁은 대기만성형 선수다. 동성고 시절 3년 내내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프로 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대학을 거쳐 뒤늦게 프로에 입문한 뒤에도 오랜 시간을 벤치와 2군에서 보냈다. 하지만 포기하거나 꺾이지 않았고, 남들은 전성기가 지났다고 하는 서른살이 넘어 야구에 눈을 떴다. 그리고 올겨울 ‘FA 대박’의 주인공이 됐다.
노진혁의 야구 인생은 올 시즌 또 한번의 터닝포인트를 앞두고 있다. 데뷔 때부터 몸담은 친정 NC를 떠나 롯데 자이언츠에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오래전 제리 로이스터 시절 ‘노피어’ 야구의 팬이었다는 노진혁은 이제 부산 롯데팬들의 환호와 응원 앞에 설 참이다.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탁월함으로 만들어온 노진혁의 이야기에 베이스볼 코리아가 귀를 기울였다. (이 인터뷰는 2023 시즌 개막 전에 진행했습니다)
아니, 못본새 얼굴이 엄청 까매졌네요. 스프링캠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웃음)
괌 햇볕이 엄청 뜨겁더라고요. (웃음) 선크림을 바르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탔네요.
올겨울에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지 피부색만 봐도 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죠.
새 팀 롯데에는 잘 적응하고 있나요.
이제는 다 적응했죠. 내일부터 시범경기 기간이니까 이제부턴 야구장에만 잘 적응하면 됩니다. (웃음)
흔히들 얘기하는 ‘FA(프리에이전트) 대박’의 주인공이 된 소감은 어떻습니까.
뭐랄까요. FA 계약을 맺고 처음 사직야구장에 출근할 때 느낌이 묘하더라고요. 워낙 창원에서 오래 살다가 떠나려니 어색하기도 하고, 진짜 떠나는 게 맞나 좀처럼 실감이 안 났어요. 솔직히 제가 FA 계약을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요.
그런가요.
같은 팀에 나성범, 박민우 등 야구 잘하는 선수가 워낙 많았잖아요. 저 같은 경우 군대 다녀와서 조금 꽃을 피우긴 했지만, 입대 전까지는 FA 같은건 전혀 생각도 못했어요. ‘전역한 뒤 야구를 잘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만 가득했죠. FA 자격을 얻기만 해도 대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으로도 꿈을 이룬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좋은 대우까지 받았으니까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야구는 언제 처음 시작했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시작했어요. 원래부터 운동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야구는 물론 농구, 축구까지 다 했어요. 야구는 친형과 함께 동네야구로 즐겼고, 농구는 여럿이도 하고 혼자 슛연습만 하기도 했고요. 또 축구는 학교 친구들과 같이 했죠. 스포츠 자체를 다 좋아했어요.
그 중에 야구를 선택한 거네요.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았어요. 당시 광주 대성초등학교 야구부가 부원이 부족했거든요. 야구부 감독님이 제가 다니는 학교로 부원을 모집하러 오셨습니다. 저도 야구가 너무 하고 싶었고요. 집에 가서 부모님께 졸랐죠.
흔쾌히 허락하셨나요.
아니요. (웃음) 밥 안 먹고 시위했어요. 며칠을 밥 안 먹고 버티니까, 마지못해 허락해 주셨죠.
지금은 유격수지만 초등학교 때는 ‘오타니’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투수와 타자 둘 다 잘했다던데요.
원래 초등학교 때야 거의 다 투수 타자를 같이 하고, 중학교 때부터 투타를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전 중학교 때도 투수를 계속했고, 원래는 고교에서도 할 생각이었어요. 투수가 정말 하고 싶었는데, 그때 같은 학년에 투수가 너무 많았거든요. 결국 감독님이 야수를 하라고 하셔서 유격수와 3루수를 맡게 됐죠.
야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처럼 우투좌타였나요.
사실 저 같은 경우 처음에는 오른쪽 타석과 왼쪽 타석이 비슷비슷했어요. 양쪽 타석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엔 아마추어 야구에서 좌타자가 유행이었거든요. 양쪽 다 비슷하면 좌타자를 하라고 하셔서, 야구 시작하고 한달 뒤부터는 계속 좌타자만 했습니다. 그냥 스위치 히터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데. (웃음)
20억은 더 받았겠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진짜로 스위치 히터를 했어도 괜찮았을 것 같아요. 어렸을 땐 정말 양쪽 타석에 큰 차이가 없었거든요. 제가 봤을 땐 괜찮았어요.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또 다르게 생각하면 우타자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요즘에는 우타자가 부족하다고 하잖아요. 좌타자보다는 좀 더 자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가끔씩 그런 생각도 들죠. 이제 와서. (웃음)
어릴적 롤모델은 누구였습니까.
전 어렸을 때 투수를 좋아했어요. 특히 박찬호 선배님 경기를 진짜 많이 봤습니다. LA 다저스 경기는 새벽에 일어나서 볼 정도였어요. 또 자란 곳이 광주다 보니 해태 타이거즈(KIA의 전신) 경기도 많이 봤죠. 해태 우승하는 경기도 많이 보고. 그때는 이강철 감독님(KT 위즈) 투구폼이 예뻐 보여서 자주 따라하곤 했어요. 그렇다고 투수할 때 사이드로 던진 건 아니고, 마운드에서는 오버핸드로 던졌습니다.
유격수 중에 어릴적 롤모델이 박찬호, 이강철인 사람은 처음 봅니다.
그땐 그랬어요. 투수가 타자보다 훨씬 더 멋있어 보였어요. 투수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야구선수가 장래희망이자 인생의 목표가 된 건 언제쯤인가요.
아무래도 중학교 때 같네요. 광주 동성중 시절에 투수와 타자를 겸업했는데, 제 기억엔 그때 야구하는 게 참 재미있었어요. 투수로는 윤명준(롯데)과 둘이서 거의 다 던졌어요. 명준이가 저보다 훨씬 잘 던지긴 했지만요. 야수로는 수비도 방망이도 팀내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어요. 밀어치고 싶으면 밀어치고, 당겨치고 싶으면 당겨치고. 마음먹은 대로 야구가 잘 됐어요. 자신감도 있었고요.
동성고에서도 1학년 때부터 바로 주전으로 경기에 출전했잖아요.
그런데 고교에 올라가니 중학교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고등학교엔 빠른 볼을 던지는 투수가 많더라고요. 또 알루미늄이 아닌 나무 배트를 썼기 때문에 배트 컨트롤하기가 좀 어려웠어요. 솔직히 고교에선 저 스스로가 그렇게 야구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야구를 예쁘게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던 것 같고요.
아쉽게도 고교 3학년 때 신인드래프트에서 프로팀의 지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실망이 컸을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큰 상처였죠. 주변에서 ‘연고지 선수니까 KIA에서 데려갈 거다’ ‘몇 라운드 안에는 뽑힐 거다’란 말을 계속 들었거든요. 그랬는데 막상 지명을 못 받았으니까 실망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프로에 와서 나이를 먹고 돌아보니까, 제가 그렇게까지 앞 순위에서 뽑힐 만한 선수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스스로 인정하게 됐어요.
KIA 유니폼을 입는 게 꿈이었나요?
그게 사실은, 학창 시절 때 좋아한 팀은 두산 베어스였어요.
계속 반전이네요. (웃음)
그 당시 김동주 선배, 정수근 선배 야구하는 게 멋있어 보였거든요. 마무리 진필중 선배님도 멋있었고요. 두산이 뭔가 야구하는 게 짜임새가 있어 보였어요. 특히 2001년 한국시리즈 보면서 두산 야구가 멋있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대학교에 가서는 다른 팀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느 팀인가요.
그 당시 롯데 자이언츠 감독님이 제리 로이스터였어요. 그때는 롯데가 진짜 멋있더라고요. 야구를 재밌게 했어요. 흔히 야구가 투수놀음이라고 하지만 팬들 입장에선 방망이를 잘 치면 그게 또 재미잖아요. 롯데 팬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런 곳에서 야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죠. 저는 특정한 팀을 좋아하기보다는 팀만의 특색이나 선수를 보고 거기에 빠지는 편이었어요.
프로 지명 실패의 아픔은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처음엔 신고선수(육성선수)로라도 프로에 갈 생각이었어요. 가정 형편이 그다지 넉넉한 편도 아닌데 대학에 가면 또 돈이 드니까요. 부모님께 신고로 프로에 가던가, 아니면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때가지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부모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제가 꼭 대학에 진학하길 원하셨어요. 어머니가 눈물까지 흘리면서 설득하셔서 마음을 고쳐먹었죠. ‘부모님 말씀 듣자’고 생각하고 성균관대로 진학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성균관대는 엄청나게 훈련을 많이 하는 팀이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솔직히 야구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죠. (웃음)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선수들이 단체로 도망가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전 그래도 도망은 한번밖에 안 갔어요. (웃음) 1학년 때 딱 한번 도망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그것도 다같이 도망가니까 간 거지, 아니면 안 갔을 거에요. 어쩔 수 없이 숙소에서 도망쳐서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성균관대에서 열심히 운동한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이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실 프로 입단 당시만 해도 소위 말하는 ‘툴 플레이어’는 아니었잖아요. 발이 아주 빠르거나 파워가 엄청나게 강한 유형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타격 정확성이 좋았어요. 어떤 공이든 다 맞힐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대학교 때 힘이 붙으면서 멀리 치는 능력도 좋아지긴 했지만, 제일 자신있는 건 콘택트였습니다. 특히 밀어치기를 잘 했어요. 좌익수 뒤로 넘어가는 타구도 자주 날리곤 했거든요.
그런데 대학 시절의 그 모습이 프로 데뷔 초기엔 좀처럼 보기 어려웠습니다.
스윙이 바뀌었죠. 프로에서 만난 코치님들이 ‘좌타자는 당겨쳐야 한다. 그래야 돈을 번다’고 강조하셨거든요. 주자 1루에 있을 때 1-2루간으로 타구를 날려야 한다, 밀어치는 것보다는 당겨쳐야 한다는 얘길 수없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제가 하던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당시엔 좀 힘들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잘 극복한 것 같은데요.
군대에 가면서 ‘한번 내 마음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는데 좋은 결과로 이어졌죠. 지금은 ‘믹스’가 잘 된 것 같아요. 프로 초기엔 무작정 당겨치기만 해서 공 맞는 포인트가 하나였다면, 지금은 당겨쳐도 좀 예쁘게 당겨친다고 할까요. 공이 맞는 면이 넓어졌어요. 많이 바뀌었죠.
‘노피어’ 시절 롯데야구를 좋아했다고 했는데, 그 시절 롯데 타자들을 보면 히팅포인트가 엄청 넓은 타자가 많았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타격 연습해보면 다들 장점이 많더라고요. 제가 그런거 관찰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누구는 어떻게 치고, 어느 타이밍에 치고, 이런걸 보면 공부가 돼요. 우리팀 선수들 타격하는 걸 보면 참 괜찮더라고요. 특히 (안)치홍이 타격하는 거 보면 ‘야, 나는 왜 저렇게 안 배웠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진짜 좋더라구요.
나도 저런 타격을 하고 싶다?
안치홍 보면 공이 오는 대로, 그 방향대로 치잖아요. 그게 좀 멋있더라고요. 전에도 상대팀에 있으면서 보긴 했지만, 이제는 같은 팀이라 연습타격할 때 바로 뒤에서 볼 수 있잖아요. 보고 있으면 ‘와’ 소리가 나오죠. 나중에 우리 아들이 야구한다고 하면 저렇게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웃음)
아들이 몇 살이죠? 야구를 좋아하나봐요.
지금 6살이에요. 저야 (야구를) 시키고 싶은데 본인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전 야구는 ‘꼬라지(호남 방언, ‘성질 부른다’는 뜻)’가 좀 있어야 잘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녀석도 꼬라지가 꽤 있어서… (웃음) 하면 잘할 것 같아요.
이번엔 수비 얘기를 좀 해볼게요. 고교, 대학 때도 수비 잘한다는 평을 듣는 선수이긴 했지만 프로에 온 뒤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엘리트 수비수로 성장했습니다.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 같아요.
아마추어 시절엔 제 나름대로 수비도 잘하고 공도 잘 던진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프로에 오니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NC 입단해서 처음 펑고 받은 뒤에 들은 말이 뭔지 아세요? ‘넌 던지는 폼부터 바꿔야겠다’였어요.
당시 수비코치면 이동욱 전 감독님 얘기죠?
예, 맞아요. 그땐 제가 완전히 사이드 스로로 던졌거든요. 처음엔 그 말씀을 듣고 ‘왜 바꿔야 하지?’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던 거에요. 옆으로 던지면 공이 휘어지거나 엉뚱한 곳으로 날아갈 확률이 훨씬 높거든요. 제 경우에도 잡는 건 기껏 잘 잡아놓고 송구가 벗어날 때가 많았어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옆으로 던지지 말고 항상 위에서 아래로 던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수비는 언제부터 잘하게 됐습니까.
프로 첫해에는 수비도 못했지만, 방망이도 잘 못쳤어요. 제가 생각해도 ‘내가 이 정도인가’ 싶을 정도로 타격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너무 못 치니까 그나마 수비하는 게 좀 더 재밌더라고요. 타격보단 잘 하니까요. 타격은 연습만 해도 스트레스 받는데, 차라리 수비가 재미있었죠. 러닝할 시간에도 글러브 들고 이동욱 감독님께 가서 ‘수비 훈련 좀 시켜주세요’ 할 정도였어요. 러닝하는 쪽에선 막 ‘노진혁 어디갔어?’ 찾고 그랬죠. (웃음)
타격보다 수비 연습이 재미있다는 야구선수는 처음 봅니다. (웃음) 보통은 치는 걸 훨씬 재밌어하지 않나요.
전 지금도 수비가 제일 재미있어요. 이동욱 감독님도 제가 계속 가서 귀찮게 하니까 많이 도와주셨어요. 제가 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일주일에 6일 운동하면 4, 5일은 이 감독님과 수비 연습을 했어요.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한 게 아니라 즐겁게, 자발적으로 했다는 게 포인트네요.
저 스스로 수비가 느는 게 보였어요. 원래 전 백핸드 캐치가 서툴렀습니다. 언제더라, 한번은 백핸드 연습을 하는데 37개를 연속으로 못 잡은 적도 있어요. 그랬던 선수가 어느 순간부터 타구를 핸들링해서 잡고, 어렵게 오는 타구도 잡아내고, 옛날에는 날리던 송구도 똑바로 던지게 되고, 어깨도 좋아지고. 수비가 느는 게 보이니까. 정말 재밌었죠. 근데 수비는 계속 좋아지는데 방망이는 늘 기미가 안 보이더라고요. (웃음) 그 시절 제게는 방망이보다 글러브가 훨씬 더 귀한 보물이었죠.
수비에 재미를 붙인다. 나이 어린 후배 선수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네요.
전 군대 다녀오고 뒤늦게 1군에서 자리잡은 케이스잖아요. 주위를 보면 저보다 늦게 들어와서 일찌감치 그만둔 후배도 많아요. 제 경우엔 그래도 수비라도 어느정도 하니까 계속 프로에 붙어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방망이를 그렇게 못 쳤는데 이렇게 FA도 하고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수비 덕분인 것 같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군복무를 계기로 타격 실력까지 몰라보게 좋아졌습니다. 통산 홈런 71개 중에 67개가 상무에서 돌아온 뒤 때린 홈런입니다. 뭐가 달라진 건가요?
후배 선수들에게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후배들은 후회없는 야구를 했으면 좋겠어요.
후회 없는 야구라, 그게 어떤 건가요.
제가 어렸을 때는 제가 하고 싶은 야구를 마음껏 하지 못했어요. 저랑 안 맞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남들이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느라 제 야구를 못했거든요. 그만둘 때는 그만두더라도 자기가 추구하는 야구, 하고 싶은 야구를 원없이 다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게 결국엔 야구를 잘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 같은 경우엔 그걸 좀 늦게 알았죠.
그게 언제쯤인가요.
상무 다녀온 뒤, 그러니까 서른살 쯤이죠. 사실 상무에 있을 때부터 야구를 바라보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제 나이를 생각하면, 만약 전역한 뒤에도 계속 야구를 못하면 그때는 정말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라도 정말 원없이, 후회없이 해야겠단 결심이 생겼죠. 저보다 상무 한 기수 위인 이원석 형(현 키움)도 자극이 됐어요.
어떻게 자극이 됐습니까.
원석이 형이 상무 2년차 때 친 홈런이 9개 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전역하고 다음해 삼성에 가더니, 갑자기 홈런을 20개씩 치더라고요. 전 상무 2년차 때 홈런 11개 쳤거든요. 그때 생각했죠. ‘여기서 홈런 9개 친 원석이 형도 20홈런을 치는데, 나도 11개 쳤으니까 충분히 할 수 있다.’ 20개까지는 아니라도 두 자릿수는 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입대 전까지만 해도 홈런 타자는 아니었잖아요.
그랬는데 희한하게 상무에서 스윙을 바뀐 뒤부터 장타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2군이긴 하지만 프로 와서 처음으로 타율 3할도 기록해 봤고요. 거기서 터닝 포인트가 되고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죠. 그 상태로 전역했는데, 포스트시즌 롯데전에서 홈런 2개를 때린 거에요. 거기서 야구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당시 포스트시즌 현장에 있었는데, 노진혁 선수 스윙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김경문 당시 감독님도 놀라셨어요. 제가 전역하고 와서 방망이 치는 걸 보시더니, ‘넌 뭘 어떻게 했길래 사람이 달라져서 왔냐’고 하셨어요. (웃음) 후배들도 그렇게 자신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야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뒤로 정말 한 시즌 두 자릿수 홈런을 치더니, 2020년에는 만 31세 나이에 처음 20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서른살 쯤 되니까 코치님이 말씀하시는 걸 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응용하는 능력이 생겼어요. 어렸을 때는 그냥 맹목적으로 ‘예, 알겠습니다!’만 계속 했죠. 그게 결국 저에겐 독이 됐던 것 같아요. 후배들은 그런 실수를 하지 말고, 잘 소통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요즘에는 소통을 강조하는 분위기라서 코치님들도 선수 얘기를 많이 들어주시는 편이잖아요. 그러다 보면 저처럼 FA까지 하는 날이 올 거에요. 저도 제가 FA를 할 줄 몰랐거든요. (웃음)
이원석 선수가 노진혁 선수에게 자극이 된 것처럼, 후배 선수들에게도 노진혁 선수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겁니다.
NC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린 선수들에게 항상 얘기해요. ‘야, 나도 FA 하는데 너희들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요. 정말 요즘 보면 저보다 훨씬 잘하는 후배도 많고, 재능있는 선수가 참 많아요. 윤동희, 김민석 이런 친구들 보면 부러워요. 제가 어렸을 때 이런 실력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요.
지금까지 야구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는 누군가요.
이동욱 감독님이죠. 수비코치 하실 때부터, 나중에 감독님 되셔서까지 거의 아들 급이었으니까요.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제일 존경스러운 한 분만 꼽자면 이동욱 감독님이 생각납니다.
야구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FA 대박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노진혁의 다음 꿈은 뭔가요.
솔직히 말하면 그냥 무탈하게 쭉 갔으면 좋겠어요. 야구할 날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앞으로 길어야 5~6년이고 그 이상은 하늘이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와이프는 저한테 그 전에 골든글러브 하나 타오라고 하더라고요.
롯데 팬들은 우승을 바라지 않을까요.
그러면 정말 좋겠죠. 제 자리에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우리 팀도 좋은 성적이 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릴적 부산 사직야구장에 가득찬 롯데 팬들을 보면서 동경했거든요. 신문지 응원, 봉지 응원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어요. 만약 우승까지 하면, 정말 난리가 나겠죠? (웃음)
<베이스볼코리아> 4월호에 게재된 인터뷰입니다.
베이스볼코리아는 한국 유소년 야구, 고교야구 등 학생 야구를 기반으로 KBO리그 유망주와 스카우트, 신인드래프트 소식을 전하는 야구 전문 매거진입니다. 한국판 ‘베이스볼 아메리카’를 표방하며 지난 2019년 3월 창간해 오프라인 월간지와 유튜브 방송, 온라인 매체를 통해 풍성한 야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꿈을 향해 땀 흘리는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과 현장 야구인들의 노력을 조명하고, 건전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베이스볼코리아의 지향점입니다. 2023년엔 ‘MK스포츠’를 통해 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베이스볼코리아 배지헌 에디터 press@baseballkorea.kr
[김원익 MK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