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월 열릴 2024 파리올림픽 남녀 마라톤에서 한국은 역대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메달획득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남녀 각 3명씩 6명이 참가할 수 있는 올림픽에 단 1명의 선수조차 파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갈수록 참가 기준기록은 상향 조정되고 있으나 국내 선수 기량은 오히려 퇴보해 올림픽 무대에 설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손기정(1936년 베를린올림픽 우승), 서윤복(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함기용(1950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황영조(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 이봉주(2001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등 마라톤 스타를 배출한 한국마라톤의 위상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다.
대한육상경기연맹과 동아일보, 서울시가 지난 17일 공동주최한 2024 서울마라톤 겸 제94회 동아마라톤은 최악의 상황을 맞은 한국마라톤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저말 이머르 머코넌(27·에티오피아)이 2시간 6분 8초로 우승한 남자부는 6위까지 2시간 6분대를 기록했는데 국내부 1위를 한 김홍록(22·건국대A)은 2시간 14분 20초로 전체 17위에 머물렀다. 우승자 머코넌과는 8분 12초 차로 약 3km의 거리 차를 보였다.
프끄르터 워러타 아드마수(23·에티오피아)가 2시간 21분 32초로 1위를 한 여자부에서도 한국은 임예진(29·충주시청)이 2시간 28분 59초로 국내 1위, 전체 10위를 기록하며 우승자 아드마수와 7분 27초의 격차를 보였다.
문제는 한국마라톤 기록이 아프리카 기록에 크게 뒤지는 것이 아니라 올림픽 참가 기준기록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데 있다. 2024 파리올림픽 남자마라톤 참가 기준기록은 2시간 8분 10초, 여자는 2시간 26분 50초인데 이를 충족시킨 한국 남녀 선수가 1명도 없다.
물론 4월 말까지 세계육상연맹(WA)이 공인한 대회에서 기준기록을 넘어서거나 랭킹포인트를 쌓으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으나 기량이 뒤처진 한국 선수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WA는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종전 2시간 14분 59초이던 남자부 참가 기준기록을 2시간 11분 30초로 3분 29초 앞당겼고, 2024 파리올림픽에서는 다시 3분 20초 빠른 2시간 8분 10초로 조정했다.
WA는 도쿄올림픽 때 여자부도 2시간 45분 00초이던 것을 2시간 29분 30초로 15분 30초나 단축했고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2시간 26분 50초로 2분 40초를 앞당겼다.
하지만 한국마라톤은 이번 서울마라톤 겸 제94회 동아마라톤에서 보여주었듯이 남자부는 2시간 14, 15분대가 우승권에 들어있고 여자부 역시 2시간 28분대 이후의 선수들이 정상권을 차지하고 있어 WA의 올림픽 참가 기준기록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남자마라톤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로 우승한 황영조가 2시간 8분 47초의 기록보유자였고, 2001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인 이봉주 역시 2000년 도쿄마라톤에서 2시간 7분 20초의 한국기록을 수립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으나 이후 퇴보를 거듭해 왔다.
그래도 한국마라톤은 2020 도쿄올림픽 등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는 꾸준히 선수를 파견해 왔는데 이제 올림픽 메달획득은 물론 단 1명의 선수조차 올림픽에 내보낼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민족 스포츠’ 한국마라톤이 어찌하다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됐나? 전문가들은 저출산으로 학부모들이 1, 2명뿐인 자녀들을 운동장에 내보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어릴 때 육상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하다 마라톤으로 자연스럽게 전향해야 하는데 중장거리 선수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17일 열렸던 서울마라톤에도 마스터스 마라톤에는 3만8000명이 몰렸으나 엘리트 부문은 그 규모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국내 엘리트 부문 남자선수는 44명이 신청, 24명이 완주했고 여자선수는 10명이 참가, 8명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국내 최대규모 마라톤 대회에 남녀 54명이 참가, 32명이 완주할 정도이니 한국 엘리트 마라톤의 장래가 암울할 수밖에 없다.
마라톤 지도자들은 등록선수가 남녀 각각 100명이 안 되는 좁은 저변도 문제이지만 훈련시설의 태부족도 큰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잠실올림픽 주경기장, 보조경기장, 동대문운동장 등은 각종 보수 공사로 사용할 수 없고 한국체대나 서울체고 운동장을 사용하려고 해도 학교 측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도 하남시 운동장의 경우 일반 시민은 사용을 허락하면서 엘리트 선수들은 시청직원들이 내쫓기 일쑤다.
김재룡(58) 한국전력 감독은 “케냐의 경우 전지 훈련차 유럽, 미주, 일본, 인도 등지에서 많은 선수가 오는데 한국선수는 대관령이나 남해 등 국내 훈련에만 매달리고 있다”며 “마라톤 중흥을 위한 장기 계획 마련에 문체부 등 정부가 대한육상경기연맹을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종세(대한언론인회 총괄부회장·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