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레슬링이 파벌 싸움의 여파로 2020 도쿄 올림픽에 이어 12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폐막한 2024 파리올림픽에서도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다.
1960년대 장창선(81)의 세계선수권대회 제패와 1970년대 양정모(71)의 올림픽 제패 위업을 달성했던 한국 레슬링이 몰락의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다.
장창선과 양정모는 한국 레슬링이 대한체육회 산하 82개 경기단체 가운데 맨 먼저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에서 각각 우승을 일궈낸 ‘스포츠 영웅’이다.
하지만 2012년 삼성이 대한레슬링협회에서 손을 뗀 뒤 레슬링계는 협회 주도권을 놓고 법정 투쟁 등 파벌 싸움을 일삼느라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게을리하다 2회 연속 ‘올림픽 노메달’이란 최악의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한국 레슬링의 과거는 화려했다. 한국 레슬링 전성기의 첫 번째 주자는 ‘살아있는 전설’ 장창선이다. 장창선은 19세 때인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딴 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은메달을 추가했으며 1966년 미국 톨레도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땄다.
이는 한국 스포츠사상 전 종목을 통틀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 따낸 금메달이었다. 대한민국 올림픽 금메달 1호인 양정모도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 선수로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우승의 여세를 몰아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몽골의 오이도프, 미국의 진 데이비스 등을 따돌리고 건국 이후 올림픽 첫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이어 1984년 LA 올림픽(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에서는 자유형의 유인탁, 그레코로만형의 김원기,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는 자유형의 한명우, 그레코로만형의 김영남이 잇달아 우승했다.
이후에도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자유형의 박장순, 그레코로만형의 안한봉,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자유형 심권호의 2연패,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그레코로만형 정지현, 2012년 런던올림픽 그레코로만형 김현우 등이 금메달을 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금맥’을 이어온 것이다.
하지만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선 김현우가 동메달 1개를 따는데 그치고 2020 도쿄올림픽과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는 그나마 동메달도 건지지 못하는 참패를 기록했다.
파리올림픽의 경우 남자 그레코로만형 130㎏급 이승찬(강원체육회)은 지난 6일 1라운드에서 쿠바의 레슬링 전설 미하인 로페스에게 0대7로 완패했고 패자부활전에서도 아민 미르자자데(이란)에게 0대9로 졌다.
남자 그레코로만형 97㎏급에 출전한 김승준(성신양회)도 1라운드에서 아르투르 알렉사냔(아르메니아)에게 0대9로 패했고, 패자부활전에서 루스탐 아사칼로프(우즈베키스탄)에게 2대8로 완패했다.
북한 문현경의 기권으로 가까스로 올림픽 출전권을 얻은 여자 자유형 62㎏급 이한빛(전북 완주군청) 역시 지난 9일 열린 1회전에서 루이자 니메슈(독일)에게 0대3으로 패하며 초반 탈락했다. 한국 선수 3명이 이번 대회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것이다.
이 같은 결과는 예견된 것이었다. 한때 올림픽 효자종목으로 꼽혔던 한국 레슬링은 2012년까지 회장사를 맡았던 삼성이 퇴장하면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레슬링 선수로 활약했던 이건희 그룹 회장의 주도로 1981년부터 레슬링협회를 맡아 30여 년간 300억 원 이상을 투자한 삼성을 밀어낸 일부 레슬링인들이 협회 주도권을 잡기위해 법정에서 파벌싸움을 벌이고 있어 협회가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 결과 구심점을 잃은 한국 레슬링은 이렇다 할 유망주는 발굴하지 못한 채 휘청거리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동메달 1개에 그치더니 2020 도쿄 올림픽에선 1972년 뮌헨 올림픽 이후 49년 만에 ‘올림픽 노메달’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았고 2024 파리올림픽에서도 도쿄 올림픽의 전철을 밟았다.
레슬링협회는 2021년 4월 법정 싸움 끝에 육가공업체 CKF 푸드시스템의 조해상 회장을 제36대 회장으로 영입했으나 현재도 구집행부 임원들과의 법정 시비가 이어지고 있어 조 회장은 임기가 끝나는 올 연말 회장직 사퇴 의사를 보이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다.
이에 대해 레슬링계의 원로들은 “메달박스였던 레슬링의 경기력 복원을 위해서는 문체부 등 정부 기관이 개입해 레슬링협회 정상화를 유도해야 하며 레슬링인들의 단합과 자중도 요구된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종세(대한언론인회 부회장·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