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야치(家鷄野雉). 집안에 많은 닭(鷄)이 있는데도 식솔들은 들에 있는 꿩(雉)만 좋아하는 것을 빗댄 중국의 사자성어다. 4세기 진나라 시절 유익(庾翼)이라는 유명한 장수가 있었는데 그는 서예(書藝)도 뛰어나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와 견줄만했다.
소문이 퍼지자 유익의 글솜씨를 배우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정작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보다는 왕희지의 필체 배우기에 몰두하자 유익이 한탄하면서 한 말이 가계야치다.
필자가 굳이 가까이 있는 흔한 것은 업신여기고 멀리 떨어진 드문 것은 귀하게 여기는 가계야치 풍조를 소환한 것은 최근 대한축구협회(회장 정몽규)가 대표팀 감독을 고르면서 국내파는 외면하고 외국인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축구협회는 한국의 2022 카타르월드컵 16강 진출을 이끈 파울루 벤투(54) 감독이 지난해 12월 13일 고국 포르투갈로 돌아가자 지난 1월 4일 국가대표 감독 선임을 총괄할 전력강화위원장으로 미하엘 뮐러(58·독일) 위원장을 선임했다.
지난 2018년 4월 축구협회 지도자 교육 강사로 부임해 기술발전위원장을 두 차례 역임한 뮐러 위원장은 1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대표팀 감독 선임 기준으로 ▲전문성 ▲경험 ▲확실한 동기부여 ▲팀워크 능력 ▲환경적 요인(한국 생활 가능 여부) 등 5개 항을 제시하면서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국적은 따지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축구협회는 1월 중으로 최종 후보군을 선정한 뒤 면접으로 역량을 점검하고, 2월에 우선순위에 따라 개별 협상을 진행해 선임을 완료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벤투가 포르투갈로 귀국한 지 2개월이 넘었는데도 최종 후보군을 선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뮐러 위원장 등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한국인 감독보다는 외국인 감독 영입에만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축구협회가 접촉한 외국인 감독으로는 바히드 할릴호지치(71·유고슬라비아) 전 모로코 대표팀 감독, 아데노르 레오나르도 바치(약칭 치치·61·브라질) 전 브라질 대표팀 감독, 호세 보르달라스(59·스페인) 전 발렌시아 감독, 토르스텐 핑크(56·독일) 전 함부르크 감독, 로베르트 모레노(46·스페인) 전 스페인 대표팀 감독 등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들 감독은 거의 대한축구협회의 대표팀 감독직 제의를 거부한 것으로 현지 매체들은 보도하고 있다.
‘백전노장’ 할릴호지치 감독은 유고의 ‘라디오 사라예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과 통화는 짧게 끝났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 프로팀에서도 많은 전화가 온다”면서 대한축구협회 제의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매체들은 지난 1월 21일 일제히 “카타르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8강까지 이끌었던 치치 감독이 대한축구협회가 제안한 감독직 제의를 거절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스페인 매체 아스는 지난 11일(현지시간) “모레노 전 스페인 감독이 카타르 월드컵 이후 새 감독을 찾는 한국과 에콰도르의 관심을 받는다”고 전했다.
이 매체는 “한국이 파울루 벤투 감독과 결별한 뒤 새 프로젝트를 이끌 후보로 모레노 전 감독을 올려 놓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매체는 대한축구협회가 모레노 전 감독과 접촉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가 대표팀 감독 선임을 위해 한국인 지도자와 접촉했다는 보도는 아직 없다. 내국인이나 외국인을 가리지 않겠다고 발표만 해놓고 아예 한국인 지도자는 배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3월 24일 울산에서 콜롬비아, 28일에는 서울에서 우루과이와 각각 국가대항전 A매치가 예정돼 있는데도 아직도 대표팀 사령탑을 결정하지 못하고 외국인 감독 타령만 하는 대한축구협회가 안타깝기만 하다.
지난 14일 5년 넘게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지도하고 귀국한 박항서(64) 감독은 공항 기자회견에서 “감독 선발 권한을 쥐고 있는 전력강화위원장을 외국인(뮐러)으로 한 것부터가 잘못됐다”며 “한국에도 유능한 지도자가 많은데 굳이 외국인 감독만 선호하는 대한축구협회의 의중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자신은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에서 더 이상 감독직을 맡지 않겠다고 못 박은 박 감독은“지난 4년간 외국인(벤투)이 했으니 이제는 한국인에게도 기회를 줘야한다”고 덧붙였다.
박 감독의 말이 아니더라도 한국은 이미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허정무(68) 감독이 한국축구를 16강 반열에 올려놓았다. 벤투의 16강 진출보다 12년이나 앞선 기록이다.
물론 2014년 브라질(홍명보 감독) 2018년 러시아(신태용 감독) 월드컵에서는 실패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을 외국인에게만 의존할 것인가.
한국인 감독 후보로는 전북의 K리그 6회 우승, 아시아 챔피언스리그(ACL) 2회 우승에 빛나는 최강희(64) 감독이나 2020 도쿄올림픽에서 한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던 김학범(63) 감독 외에도 최용수(50) 강원 FC 감독 등 K리그 현역 지도자가 차고도 넘친다.
해외의 흐름도 대표팀 감독은 자국 출신이 맡는 추세다. 지난해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 32개국 중 외국인 감독은 8개국뿐이었으며 16강 진출국은 한국만 유일하게 외국인이 사령탑을 맡았었다.
이웃 일본만 해도 지난해 12월 모리야스 하지메(55) 감독과 2026년 북중미 월드컵까지 4년 재계약을 체결했다.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대표팀 감독 연임을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 스페인, 코스타리카와 함께 ‘죽음의 조’에 묶였으나 당당히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유럽 유명 클럽의 유소년 시스템을 도입해 유망주들을 발굴, 육성했다. 또 스폰서들의 도움을 받아 유망주들을 유럽으로 보내 해외파를 대거 배출했다.
호주축구협회도 지난 12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그레이엄 아널드(60) 감독과 재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기간은 2026 북중미 월드컵까지”라고 발표했다.
아널드 감독은 호주를 이끌고 지난해 16년 만에 월드컵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프랑스, 덴마크, 튀니지 등 쉽지 않은 상대들과 같은 조에 편성됐지만, 프랑스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올랐다. 16강전에서는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만나 1대2로 아깝게 지는 등 선전했다.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도 국내파 감독이 성공할 수 있다. 외국인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국내파 감독을 발굴해 기용해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멀리 있는 것보다 주변의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다. 대한축구협회는 ‘드문 것은 귀하게, 흔한 것은 천하게 여긴다’는 사자성어 귀곡천계(貴鵠賤鷄 · 고니는 귀하게 여기고 닭은 천하게 여김)의 뜻도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성싶다.
이종세(용인대 객원교수·전 동아일보 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