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를 내려놓은 자리 ‘인류애’로 가득 채웠다. ‘이기기 위한’이 아닌 ‘지키기 위한’ 액션을 선택한 조인성은 ‘백마 탄 왕자’를 거부하고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하며 ‘휴민트’로 무르익은 배우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휴민트’는 비밀도, 진실도 차가운 얼음 바다에 수장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격돌하는 이야기다. ‘밀수’와 ‘모가디슈’에 이어 ‘휴민트’까지, 류승완 감독과 벌써 세 번째 작업이다. ‘밀수’ 속 조인성과 박정민을 보며,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작품을 보고 싶었다는 류승룡은 그 바람을 ‘휴민트’에 그대로 녹여냈고, 그 결과 ‘박정민의 멜로’와 ‘조인성의 액션’이라는 신선한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인간적으로 좋아서’ 무려 세 작품이나 연이어 작업한 끝에 ‘류승완의 페르소나’라는 수식어를 얻게 된 조인성은 ‘휴민트’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안내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나간다. 물론 “‘키다리 아저씨’처럼 보였으면 했다”는 류승완 감독의 말을 잊지 않은 채. “영화는 조과장의 시점으로 출발해서 매듭을 짓는다. 저는 안내자다. 안내자의 역할이라는 건 어떤 감정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조인성이지만, ‘액션’이라는 장르적 긴장감 속에서도 인간적인 온기는 놓지 않으며, 극의 여백을 채워냈다.
류승완 감독과 벌써 세 번째 작업이다. 계속 작업을 하는 이유가 뭔가.
감독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사살 가장 큰 요인은 제가 강동구 출신이어서 그런 것 같다. 강푹작가나 나홍진 감독님 모두 강동구에 사신다. 그래서 제 스케줄을 돌려쓰고 계신다. 많이 보다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웃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감독과 배우’ 사이를 넘어서 동지가 됐고, 더 넘어서는 한국 영화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게 됐다. 어느덧 저도 ‘선배급’의 입장이 돼서 그런지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서로 사는 곳이 가깝다 보니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본 것 같다.
박정민과 신세경의 멜로를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는가. 류승완 감독이 촬영 현장에 와서 함께 모니터링을 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고 들었다.
제가 아무리 선배라고 하더라도, 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저는 현장에서 한 것이 없다. 감독님께서 멜로를 찍을 때 현장에 나와달라고 요청하시기는 하셨지만, 그저 더블 체크를 위해 부르신 거 같다.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 나만 그렇게 느낀 건지 가장 믿을만한 조 배우는 어떻게 느끼는지를 물어보기 위한 모니터 요원으로서 있었을 뿐이다. 멜로에 있어서 저는 어떤 조언을 한 것도 없다. 예민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두 배우의 해석이 분명히 있는데 거기서 뭐라고 말을 얹는 건 실례고, 해서도 안 된다. 제 느낌을 물어보시면 이야기해 준 정도가 제가 한 전부다. 박정민과 신세경의 멜로 호흡이 좋았다면 그건 감독님과 두 배우가 훌륭하게 해 낸 것이다. 두 배우가 정말 잘했다.
조인성이 생각하고 만들어 나간 ‘조과장’은 어떤 캐릭터었는가.
‘휴민트’는 조과장의 시점으로 출발해서 매듭을 짓는다. 쉽게 말해 조과장은 안내자다. 안내자이기에 그 어떤 감정을 강요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 표정과 대사로 내가 느껴야 할 것은 이거라고 집어주는 것보다는, 관객들이 따라오게끔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지점에서 액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부분을 신경 쓰면서 연기했었는데 액션 덕분에 조과장에게 있는 다양한 모습이 보여준 것 같다.
그러면서도 무섭고 강한 국정원의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수린이나 선화(신세경 분)를 만났을 때 나오는 조과장의 말투를 통해 이들과 정서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조과장의 모습이 보였으면 했다. 북한에 계셨던 분들이 서울 말씨를 들었을 때 달콤하게 느꼈다는 인터뷰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거기에 집중해 조과장을 만들어 나갔다. 팔찌를 보면서 웃으면서 이야기한다든지, 선화에게 카디건을 입혀주면서 다정하게 말을 거는 등, 당신을 지켜줄 수 있고, 당신을 도우려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 시켜주고자 다정하게 접근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고자 하는 조과장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야 캐릭터의 입체성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박건에게 채선화는 사랑하는 연인이지만, 조과장에서 채선화는 그저 정보원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의 걱정에도 조과장은 채선화를 살리기 위해 망설임 없이 적진에 뛰어들었는데, 일각에서는 그를 구하고자 하는 동기가 박건보다 부족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나’는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조과장을 연기한 저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봤다. 저는 그렇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과장은 한 번 정보원을, 생명을 잃었던 경험이 있지 않았는가. 채선화를 향한 조과장을 감정은 연민이자, 어른의 태도였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두 번이나 그 약속을 지키게 될 뻔하지 않았는가. 조과장은 그 약속을 위해서 움직였고, 그게 대한민국의 격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한 인물의 대의와 휴머니즘이 조과장이라는 캐릭터에 잘 녹아든 것 같다. 조과장의 서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은 없었는가.
지켜보는 것이 참 힘든 역이더라. 항상 지켜보고, 정서적으로만 다가가는 것도 힘든 연기다. 가만히 화면을 채우고, 감정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나오는가 했었지만, 빈공간을 채우기 위해 표정을 과하게 하거나 멋짐을 추구하한다고 개인기를 쓰면 자칫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카메라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불안하기도 했었다.
액션 연기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액션 연기는 매일 같이 버겁다. 나이가 이렇게 됐으니 이제는 내근직으로 돌아야 하는데, ‘블랙’ 말고 ‘내근직’에서 서류 업무를 보거나 해야 하는데, 액션 연기를 하게 돼서 매 순간 굉장히 힘들다. (웃음) 저는 원래 액션 연기에 대해 큰 의의를 두는 편은 아니다. 이야기가 재밌어야 몸이 움직이는데, 거기에 액션이 있기에 그동안 해 왔을 뿐이다. 제가 액션을 잘 해냈는지도 잘 몰랐다. 그렇기에 저의 액션이 다른 사람보다 더 좋고 괜찮다고 자체적으로 평가한 적이 없다.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잘한다고 이야기해 주시고, 액션에 일가견이 있으신 감독님께서 최고라고 해주시기에 ‘칭찬 감사합니다’ 할 뿐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액션을 잘 한다고 칭찬을 받아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휴민트’에서 제가 액션을 잘했다기보다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액션 그 자체가 경이로워서 그런건 아닐까 싶다.
‘휴민트’는 조인성의 멋짐보다 박정민의 멋짐이 돋보인 영화라는 평도 있다. 박정민의 경우 이번 작품에서 ‘멋짐’을 보여주기 위해 러닝도 하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박정민의 멋짐은 저도 잘 봤다. 하지만 멋있게 나오려면 노력해야 하는 거다. 멋있게 보이는 것이 쉬운 줄 알았나. 러닝을 한다고 했는데, 사실 그거 특별한 게 아니다. 저도 아침에 일어나서 무조건 30분씩 뛴다. 처음이라서 힘들지, 이제 힘든 길로 들어섰다. 고통의 길로 어서 와라, 축하한다. ‘이제 얼굴이 푸석하네’ ‘좋네’ 이런 댓글을 받을거다.(웃음)
조 과장은 ‘멜로’보다는 ‘인류애적인 사랑’과 ‘보호’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의도한 부분도 있을 거 같은데, 한편으로는 사랑이 없어서 아쉬운 것이 진짜 없었을까.
요즘 저는 사람이 더 궁금하다. ‘인류애’도 ‘사랑 애’(愛)자가 들어가지 않느냐. 사랑도 굉장히 좋은 포인트지만, 나이가 더 먹어서 그런지 어떤 사람을 그리려고 하는지에 포커싱을 두는 편이다. 나의 모습이라든지, 나의 태도라든지, 현재 그러한 부분에 포커싱이 맞춰지는 것이 사실이다. 저는 어렸을 때 멜로를 많이 해봤다. 이제는 ‘멜로 한도 초과’라고 생각한다. 멜로가 자기 복제 하기도 쉽고, 개인의 매력도 많이 넣어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에서 자칫 자기도취에 빠질 때도 많다고 생각한. 저는 그걸 배제하고 싶고, 이제 멜로를 하기 보다는 사랑 ‘그 자체’를 잘 만들고 싶다.
저는 선화를 향한 조과장의 감정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해석은 각자의 영역이지만, 저는 정말 ‘인류애’라고 생각한다. 다만 ‘밀수’를 촬영할 당시 우리는 멜로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많은 분들이 멜로로 봐주신 부분이 있었다. 이를 비춰 봤을 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인성이라는 배우를 ‘이렇게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하는 부분이 있을까.
조만간 ‘호프’(나홍진 감독)와 넷플릭스 ‘가능한 사랑’(이창동 감독)을 통해 곧 만나뵐 수 있을 거 같다. 대중이 저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좋겠는가는 참 어려운 질문 같다. 어찌 됐든 계획대로만 이뤄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저는 흘러 흘러서 운 좋은 상태에 이르렀다. 이게 과연 앞으로의 삶에서 또 작용할지는 모르겠으나, 맡겨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 본분 같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는 것은 대중의 영역이라고 본다.
[금빛나 MK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