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ACT의 인사 팀장 최재혁은 빌런인걸까. 이에 대한 질문에 최재혁을 연기한 배우 이현균은 이렇게 답했다. “인사 팀장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기 일을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을 뿐이지 않을까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한 중년 남성이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대기업 부장’이 아닌 진정한 본인의 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던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이하 ‘김 부장 이야기’)에서 ACT의 인사 팀장은 유독 평가가 갈렸던 캐릭터로 꼽힌다. ‘인원 감축’이라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가 휘두른 무자비한 ‘칼질’을 놓고 주인공인 김부장(류승룡 분)이 결국 ACT에서 나가게 등 떠민 ‘빌런’이라는 입장과 그는 그저 할 일을 하는 현실적인 직장인이라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다.
다만 의견이 엇갈리는 와중에서도 인사 팀장 최재혁을 설득력 있게 완성해 낸 배우 이현균의 호연만은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이었기에 ‘PTSD를 부른다’는 평까지 받았던 이현균은 ‘김 부장 이야기’에서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신스틸러’ 중 하나로 꼽힌다.
“드라마를 사랑해 주시고, 봐주신 것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크다”며 종영 소감을 전한 이현균은 인사 팀장을 단순히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의 이분이 아닌, 그저 어딘가 존재할 법한, 그저 일을 하는 직장인 중 한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다고 털어놓았다.
“처음부터 이 인물이 단순한 ‘악역’으로만 비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드라마를 전체적으로 보면 주어진 일상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만 있을 뿐, 마냥 나쁜 사람은 없어요. 감독님도 그렇고 작가님도 그렇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노력하셨고, 그러한 노력이 대본에 잘 녹아 있었죠. 사실 인사 팀장이 겉으로 봤을 때는 색이 강해 보이잖아요. 사람들에게 반존대를 섞어 쓰기도 하고, 붙임성 있게 다가서는 거 같다가도 또 보면 약을 올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하필 맡게 된 일이 ‘인원 감축’일 뿐, 그 역시 그저 직장인이에요. 그래서 대본에 최대한 힌트를 얻되, 최대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였으면 했어요, 저는.”
항간에서는 진짜 인사 팀장을 데려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 아닌 의혹이 들 정도로 리얼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극찬이 이어졌던 가운데, 이현균은 “최재혁의 외형은 전적으로 의상팀과 분장팀의 힘이었으며, 내면은 모두 다 대본이었을 뿐”이라며 겸손을 표하기도.
“인물을 표현하는데 ‘100’라는 숫자가 있다면, 촬영장의 환경과 분위기, 그리고 한 캐릭터의 외형을 만들어주는 손길에서 적게는 50, 많게는 80% 이상까지 간다고 봐요. 그리고 남은 20%가 ‘배우 이현균의 생각과 바라보는 시선’이죠. 물론 살아오면서 제가 느낀 부분과 쌓인 경험치도 무시 못 하겠지만, 제가 완성시킨 리얼리티의 영역은 20% 정도일 뿐이지, 그 외에 많은 부분은 많은 이들의 수고와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방영 중 ‘진짜 인사 팀장을 데려오면 어쩌냐’는 내용의 글을 저도 보기는 했어요.(웃음) 그걸 보고 ‘회사원이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지?’라고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대본을 보면서 인물을 공부한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더라고요. 다만 그 생각은 했죠. 만약 이 캐릭터가 실제로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런 그가 내 연기를 본다면,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요. 더 나아가서는 인사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명감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죠. 그런 바람을 가지고 집중해서 대본을 읽고 연기했을 뿐이지, 그 외의 부분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죠.”
이현균의 겸손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속 인사 팀장을 보고 PTSD가 온다”는 의견이 나왔던 것은 그만큼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디테일을 잘 잡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혹시 연기를 하면서 특별히 신경 써서 연기한 부분이 있느냐는 질문에 최재혁이 업무를 수행하는 전후의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라는 대사를 할 때가 기억나요. 대본에 실제로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라고 적혀있었는데, 그 자체가 너무 강하잖아요. 최대한 ‘인사 팀장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일을 하고 있을 뿐이야’를 보여주기 위해서 강약을 줬어요. 영상을 다시 보시면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를 반복하더라도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요. 밑도 끝도 없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도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거죠. 그리고 상사와 통화하는 장면을 통해, 그 역시 위에서 쪼이고 있는 직장인임을 보여주고자 노력했어요.”
이현균이 생각하는 인사 팀장의 훗날은 어떠할까. 이에 대해 이현균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만약 그가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처지에 놓이거나 이직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잘리기 전에 이직했을 거 같다”고 답했다.
“만약 제가 인사 팀장이 된다면 어땠을까 한 번 생각은 해봤는데, 아무리 상상해도 저는 최재혁처럼 못 하겠더라고요. 극 중 최재혁은 숨길 건 숨기고 필요한 것은 챙기는,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잖아요. 근데 저는 그와 다르게 못 숨기고 있는 걸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거든요. 그렇기에 아마 인사 팀장까지도 못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하.”
그는 함께 연기했던 류승룡과 유승목과의 연기 케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먼저 류승룡에 대해 예민하게 현장에 와서, 예민하게 연기하는 예민한 배우라고 평한 이현균은 “예민하다는 말이 나쁜 의미가 아니다. 배우들 사이에서 ‘예민하다’는 말은 섬세하면서도 센티티브한 부분을 놓지지 않는다는 극찬”이라고 설명했다.
“‘김낙수’라는 인물은 ‘김 부장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이잖아요. 류승룡 선배는 극을 이끄는 전체적인 계획 안에서 상대방과의 호흡을 맞춰가는 티키타카가 좋은 배우라는 걸 연기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선배 덕분에 더 좋은 연기가 많이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죠. 류승룡이라는 배우는 제가 준비한 것보다 더 좋은 것, 새로운 것을 찾게끔 도와준 배우였어요. 유승목 선배는 연기하면서 정말 편안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걸리는 것도 하나 없었고,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을 품어주는 느낌을 받았었죠. 가장 중요한 건 상대 배우로 하여금 더 좋은 연기를 이끌어 줄 정도로 두 분 다 예민(섬세)한 배우라는 것이죠.”
‘김 부장 이야기’는 어떤 작품으로 기억될 거 같은가에 대한 질문에 “저라는 배우를 대중들에게 조금 더 알린 작품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고 말한 그는 “만약 이현균이라는 배우를 알았던 분들은 ‘자기만의 색’을 가져가고 있구나를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고 털어놓았다. ‘이현균의 색’은 무엇이냐고 되묻자, 이번에는 “현실에서 있을 법한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저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기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선과 악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그런 인물을 선호하는 거 같아요. 물론 어떤 작품에서는 조금 더 악에 치우친다든지 할 수는 있는데,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느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는 존재잖아요.”
중학교 시절까지 이현균의 꿈은 농구선수였다. 그러다 한계를 맞이하고 선수의 꿈을 접었던 그가 다음으로 눈을 돌린 곳은 연기과였다. 계기는 대단하지 않았다. 계원예고에서 음악을 전공하던 사촌 누나를 통해 ‘연기과’가 있음을 알게 된 그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말을 듣고 응시했다가 ‘턱’하고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연기과에 갔지만, 연기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보다는 ‘왜 쟤가 연기를 할까’는 시선이 더 많았다고 말한 이현균이 진짜 연기에 대해 맛을 봤던 것은 대학에서였다. 군대를 다녀온 후 만나게 된 교수님을 통해 처음 ‘연기의 맛’을 본 뒤, 졸업 후 운 좋게 학교 선배가 소개해준 극단을 통해 배우 생활이 연장됐다고 밝힌 이현균은 극단 활동을 통해 비로소 배우로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극단이 저에게 배우라면 가져야 하는 질문에 대해 많이 알려줬어요. 배우로서 연기를 하거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어떤 질문을 가져야 하는지, 어떤 궁금증을 가져야 하는지와 같은. 그리고 좋은 질문을 던져야 좋은 답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방법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죠. 그때 연기가 비로소 재밌어졌어요. 뭔가를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 걸 온몸으로 체득하는 순간이었죠.”
배우가 되고 지나온 모든 길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괜찮게 된 지 고작 2~3년밖에 안 된다”라고 털어놓은 이현균이었지만, 연기를 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이라든지 혹은 ‘후회’를 떠올린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냥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포기’를 말하기에는 일은 계속했었거든요. 만약 일이 떨어졌으면 ‘포기해야 하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기에 저는 계속 연기를 했어요. 다른 생각을 하기에는 배역이라든지 대본 고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거든요. 물론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어요. 근데 제 성향 자체가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돈을 좀 덜 쓰면 되기에, 불편함 크게 없었어요. 저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었던 것에 대해 늘 감사하며, 지금까지 잘 온 것 같아요.”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부터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 그리고 ‘김부장 이야기’까지. 이현균의 2025년은 무척이나 바빴다. 다양한 작품으로 안방극장을 찾은 이현균은 한 해를 돌아보며 “시청자들께서 기억이 나고 각인될 만한 작품을 한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라고 밝게 웃었다.
“2026년도가 기대돼요. 올해 열심히 한 만큼 내년에는 더 즐거운 재밌는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바람도 있거든요. 새해 소원이요? 앞으로도 꾸준히 좋은 작품으로 연기하고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기도 해요.”
[금빛나 MK스포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