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현빈, 손예진 부부의 미국 가족 여행 목격담이 연일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들이 어디서 밥을 먹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을 넘어, 이제는 고작 세 살 된 아들의 사진과 영상까지 무분별하게 확산되며 도마 위에 올랐다.
가장 끔찍한 지점은 이것이 단순히 “단란해 보인다”는 덕담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포털 뉴스 댓글 창에는 “엄마를 닮았네”, “아빠의 눈매가 없네”라며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외모를 두고 노골적인 품평회가 열렸다.
톱스타 부부를 향한 대중의 비뚤어진 관음증이, 마침내 철저히 보호받아야 할 어린아이의 얼굴에까지 예리한 칼날을 들이댄 모양새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사는 스타이기에 일정 부분 사적인 영역이 소비되는 것은 그들이 감내해야 할 숙명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 대상이 스스로를 방어할 힘조차 없는 ‘미성년 자녀’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대중의 알 권리가 아닌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자 폭력이다.
부부는 단 한 번도 미디어나 SNS에 아들의 얼굴을 온전히 공개한 적이 없다. 이는 아이의 초상권과 평범한 유년기를 지켜주고 싶어 했던 부모로서 쳐둔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해외 여행지라는 해방감의 틈새로 뻗어 나온 누군가의 스마트폰 카메라는 그 조심스러운 울타리를 비웃듯 무참히 깨부쉈다.
더 큰 문제는 미디어의 방관과 편승이다. 소셜미디어(SNS)에 떠도는 악성 파파라치성 사진을 버젓이 가져다 쓰며 ‘아들 외모 평가’라는 자극적인 타이틀로 트래픽 장사를 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는 대중의 관음증에 기름을 붓는 비윤리적 행위다.
아이의 외모를 품평하는 대중의 시선에는 묘한 ‘가학성’이 숨어있다. “엄마 아빠가 역대급 비주얼이니 아이도 완벽해야 한다”는 기형적인 기대감, 혹은 그 기대감에 미치지 못했을 때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조롱의 시선들이 댓글 창 곳곳에 끈적하게 묻어난다.
스타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외모 등급이 매겨지고 대중의 평가 대상이 되는 현실은 잔인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 아이가 자라나 자신이 인지하기도 전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외모 평가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정신적 충격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영화나 드라마 속 스타의 화려한 모습은 우리가 정당하게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맞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 속 가족과 어린 자녀는 결코 우리가 마음대로 만지고 품평할 수 있는 진열대 위의 상품이 아니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오래전 할리 베리, 제니퍼 가너 등 유명 배우들이 주도하여 “동의 없이 스타 자녀의 사진을 찍거나 유포하지 말라”는 이른바 ‘노 키즈(No Kids) 파파라치’ 법안을 통과시켰다. 주요 매체들 역시 자발적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하거나 보도를 보이콧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 잡았다. K-콘텐츠의 위상이 세계 최고를 달리는 2026년 현재, 우리의 미디어와 대중 인식은 과연 어디쯤 머물러 있는지 뼈아프게 되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예뻐서 쳐다본 것뿐이다”, “유명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은 가해자의 편리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타인의 평온한 휴식을 도둑 촬영하고, 그 안의 아이를 품평회 위에 올리는 행위는 엄연한 ‘관음증적 집착’일 뿐이다.
이번 미국 휴가 중계 사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지금 좋아하는 스타의 행복을 응원하는 팬인가, 아니면 사생활을 땔감 삼아 자극을 소비하는 잔인한 구경꾼인가. 이제는 미디어도, 대중도 스스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스타의 아이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대중의 뜨거운 관심과 품평이 아니라,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평범하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무관심의 권리’다. 화면 너머의 랜선 이모, 삼촌을 자처하기 전에 먼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성숙한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시점이다.
[MK스포츠 홍동희 선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