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코리아] “명장 대신 또 다른 이의 아버지이고 싶다” 대전고 김의수 감독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지금은 돌아가신 고 김영빈 감독님. 바로 제 아버님입니다.” 지난해 12월, 일구상 시상식에서 시상대에 오른 김의수 대전고 감독은 문득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1977년 공주고를 창단 첫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던 아버지처럼, 아들인 그도 2022년 대전고를 전국 무대 정상에 올려놓았다. 45년 세월을 넘어 ‘부자’ 우승을 이룬 2세 감독에게 주어진 일구상 ‘아마 지도자상’은 야구 선배들이 보내는 최고의 찬사이자 격려였다.

생전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야구 원로들 앞에 선 김 감독은 떨리는 목소리로 “어렸을 적 (아버지가) 국가대표 감독, 코치 생활을 오래 하셔서 1년에 얼굴도 몇 번 보기 어려웠다. 아버님을 볼 때마다 이런 위대한 분의 함자에 흠집 내면 안 되겠다 생각했고, 지금까지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면서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않을 거고요. 우리 선수들, 후배들 육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감을 밝혔다. 미리 준비한 멘트나 형식적인 말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온 수상 소감에 객석에서는 큰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진=베이스볼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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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독 롤모델은 아버지였다”

베이스볼코리아(이하 ‘BK’): 작년 일구상 시상식에서 남긴 수상 소감이 한동안 화제였습니다. 당시 저도 취재하러 현장에 있었는데요, 다른 수상 소감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감독님 수상 소감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김의수 감독(이하 ‘김’): 사실 아버지 얘기를 하려고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웃음)

BK: 미리 준비한 수상 소감이 아니었나요.

김: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다가 시상대에 올라갔는데, 눈앞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 와중에 시상대 바로 앞에 앉아계신 김인식 감독님이 보이지 뭐예요. 김 감독님 얼굴을 보니까 불현듯 아버지 생각이 나서, 즉석에서 얘기하게 됐습니다.

BK: 선수 시절인 1987년 대전고가 청룡기에서 우승했을 때 감독인 아버지와 우승을 합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 아,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기사가 잘못 나갔는데 대전고가 우승했을 때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분(이광렬 감독)이 감독이셨어요. 아버님이 대전고 감독일 때 멤버는 제가 아니라 이효봉, 김진홍 선배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대전고 우승을 함께한 것처럼 기사가 나왔더라고요.

BK: 그럼 아버지를 감독으로 모신 건 대전고가 아니라 원광대 시절이었겠네요.

김: 맞아요.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쭉 아버지가 감독이셨습니다. 4학년 중간쯤에 그만두셨으니까, 거의 대학 4년 내내 아버지와 함께한 셈이죠.

BK: 아버지 김영빈 감독은 야구계 대표적인 덕장이자 ‘호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야구인들에게 물어보니 그 시절 지도자로는 드물게 선수에게 욕설이나 손찌검을 하지 않는 분이셨다고 하더군요.

김: 맞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야구하면서 매 한 대 맞아본 적이 없고요, 방망이 끝으로 쿡 찌르는 것조차도 안 하셨어요. 선수들에게 한다는 욕이 “야 이놈아”나 “이노무 자슥” 정도가 다였어요.

사진=베이스볼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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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 1980년대에 그런 지도자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김: 저도 말로만 들어서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안 하시더라고요. 대신 정말 화나셨을 땐 선수들을 운동장에서 뛰게 했습니다. 홈에서 1루까지 왕복 50회, 2루까지 왕복 30회, 계속 달리게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몇 대 맞고 끝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웃음) 지금 생각하면 선수들을 자식처럼 참 예뻐하셨던 것 같아요. 주머니 털어서 수시로 용돈도 챙겨주고 하셨으니까요.

BK: 아버님에게 서운했던 기억은 없습니까.

김: 글쎄요. 아버지는 거의 매년 국가대표 감독, 코치로 외국에 나가셨어요. 감독 아니면 코치로 가고, 다음번엔 또 감독으로 가고. 그래서 어릴 적엔 1년에 한 6개월밖에 못 볼 때도 잦았어요. 좀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쉽죠.

BK: 감독님이 처음 야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 반응이 어땠을지가 궁금합니다.

김: 사실 어머니는 제가 야구하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셨어요. 저만큼은 절대로 야구 안 시킬 거라고 하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야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공주고 감독하실 때부터 야구장에 놀러 가 구경하고, 형들과 어울려 캐치볼하곤 했으니까요. 제가 야구를 시작한 게 신흥초등학교 때인데, 감독님이 입단 테스트 다음날 바로 연습경기에 절 내보냈어요. 그런 걸 보면 어느 정도 기본은 갖춰져 있었나 봅니다.

BK: 반대로 아드님이 야구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편집자 주: 김의수 감독의 아들 김우진은 야탑고와 동강대에서 내야수로 활약했다. 현재는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김: 뭐, 저랑 마찬가지죠. (웃음) 제가 천안 남산초 감독할 때였을 거예요. 경기에 지고 집에 들어왔는데, 제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아빠, 나 야구할래’라고 하더군요. 평소 집에서 벽에 공 던지고, 혼자 다이빙하며 놀 때 알아봤어요. 아들도 야구 시작하고 사흘 만에 바로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염색체에 있는 야구 DNA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웃음)

BK: 부자 야구 선수는 종종 봤습니다만, 감독님처럼 부자가 대를 이어 야구 감독을 하는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김: 운이 좋았죠. 제가 1993년, 나이 스물넷에 처음 감독이 됐습니다. 처음엔 초등학교부터 시작했어요. 중학교 은사님께서 “초등학교 야구부에 감독이 없다. 가서 좀 가르쳐 줘라”고 부탁하셔서 대전 유천초등학교 감독을 맡았죠. 그 뒤로 천안 남산초등학교, 대전 신흥초등학교, 충남중학교를 거쳐 대전고까지 30년 넘게 감독을 하고 있습니다.

BK: 감독으로서 롤모델은 역시 아버지라고 봐야겠죠?

김: 아무래도 그렇죠. 처음 감독 일을 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님이 선수들에게 말씀하실 때의 톤, 화를 가라앉히려고 하셨던 행동을 떠올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 것들이 감독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게 사실입니다.

사진=베이스볼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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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선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BK: 초등학교, 중학교 감독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2015년 모교 대전고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부임 당시만 해도 대전고는 그다지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김: 솔직히 말하면 상황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제가 오기 몇 년 전부터 감독, 코치들 사이에 불화가 심했어요. 서로 고소하고 법정까지 갈 정도로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지도자들끼리 싸우고 대립하는 사이 선수들은 거의 방치된 상태였어요. 훈련은 둘째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당연히 성적이 날 리가 없죠. 같은 지역 학교와 연습경기에서 18대 0으로 5회 콜드게임 패한 적도 있을 정도예요. 중학교 학생 선수와 학부모들도 다들 대전고는 가기 싫다고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BK: 그런데도 대전고 감독직을 받아들였습니다.

김: 모교에 대한 애착인가 봐요. (웃음) 다른 학교 선수들, 학부모 사이에서 대전고가 무시당하고 웃음거리가 되는 게 그렇게 듣기 싫고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대전고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얘기했어요. ‘사실 내 자신이 고교 감독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로야구 출신도 아니고. 하지만 대전고가 이렇게 망가져 있다는 건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렵다. 야구부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지고 싶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BK: 처음에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웃음)

김: 많이 했죠. 처음 와서 선수들 운동을 시키는데, 말을 너무 안 들어요. (쓴웃음을 지으며) 러닝하라고 하면 뛰다 말고 허리를 붙잡지 않나, 걸어가지 않나. 제대로 안 하는 친구들한테 ‘그렇게 운동하기 싫으면 집에 가’라고 했더니 ‘안녕히 계세요’하고 그대로 가지 뭡니까. 그렇게 나간 선수가 네다섯 명은 됐어요. 훈련이 힘들다고 단체로 도망가기도 하고, 오전 연습 시간에 다 병원 가서 7~8명만 남아서 운동한 적도 있습니다.

BK: 말로만 듣는데도 혈압이 오르는 느낌입니다.

김: 사실 대전고 감독을 맡고 5개월 만에 쓰러졌습니다.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어요.

BK: 아이고, 어쩌다가...

김: 급성 뇌경색이 찾아왔어요. (미간을 찌푸리며) 아침에 눈을 떴는데 침대에서 몸이 안 움직이지 뭐예요. 머릿속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치는데 팔다리는 꼼짝을 안 하고, 불꽃이 파파팍 튀고 눈 주위가 용암처럼 펄펄 끓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바로 병원에 실려가서 중환자실에 들어갔습니다.

BK: 그런 일을 겪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김: 병원에서는 천운이라고 하더군요. 보통은 그 정도 뇌경색이면 손이 돌아가든 지능이 떨어지든 뭔가 후유증이 남기 마련인데, 너무 말끔하게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고요. 무사히 회복해서 정말 다행이죠.

BK: 출발은 험난했지만, 이듬해인 2016년부터는 서서히 침체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았습니다. 비결이 뭔지 궁금합니다.

김: 코치들과 상의 끝에 선수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룰’을 정했습니다. 숙소 내에서 흡연이나 음주하다 적발되면 바로 아웃, 숙소 무단이탈 시 해당 학년 전체를 아웃시키기로 정했어요. 그렇게 열두 가지 규칙을 정해놓고 반드시 지키게끔 했습니다. 또 선수들과 대화도 많이 나눴습니다.

사진=베이스볼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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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K: 어떤 얘길 나눴는지 궁금합니다.

김: 이런 식이죠. ‘너희들은 학생이고, 유니폼을 입은 선수다. 학생답게, 선수답게 행동하자’ ‘학생답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생님들께 인사 잘하고, 말썽 피우지 않고,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지 말고, 참고서 책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려고 하자’ ‘선수다운 건 어떤 걸까? 운동장에서 지도자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선후배끼리는 서로 존중하자. 그게 선수다운 행동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또 하고, 지겨울 정도로 계속했습니다.

BK: 폭언, 기합, 구타와 같은 ‘쉬운 길’을 놔두고 대화와 설득이라는 어려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다 보니 순간적으로 화나고 참기 힘든 순간이 있었을 법한데, 그걸 참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요.

김: 처음엔 하루에 커피 몇 잔을 마셨나 몰라요. 혼자 벽을 치기도 하고, 땅을 걷어차기도 했어요. 화나고 분이 안 풀리니까요. 코치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컨테이너 뒤쪽에서 쿵, 쿵 하는 소리가 나길래 가봤더니 코치 한 명이 자기 머리를 들이받고 있더라고요. 그 앞에는 선수 하나가 짝다리를 짚고 서 있고요. 말로 하려고 해도 도저히 안 되니까, 화나서 자기 머리를 벽에 받아버린 거죠. 그럴 때 제가 코치들에게 한 얘기가 있습니다.

BK: 어떤 내용인가요.

김: 애들이잖아요. 아무리 컸다고 해도 그래 봐야 고등학생 애들 아닙니까. 그에 비해 저나 코치들은 성인이고, 지도자잖아요. 돌이켜 보면 저 역시도 학생 시절엔 말 안 듣고, 아무것도 모르고, 제 멋대로였거든요. 지금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애들에게 우리가 먼저 존경받으려고 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먼저 줘야죠. 그래야 아이들도 조금씩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게 돼 있어요. 애들이 반항한다고 같이 부딪히거나, 억지로 끌어가려고 하면 반발심만 커질 뿐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고삐를 당겨도 소가 안 가려고 마음먹으면 꿈쩍도 안 하잖아요. 살살 구슬려야 움직입니다. 코치들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무조건 참으라고 조언했어요. 그리고 화나는 상황이 생겼을 때 바로 선수와 상대하지 말라고. 그보단 나중에 따로 불러서 개인적으로 얘기하라고 당부했습니다.

BK: 이건 운동부 지도자는 물론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도움 될 만한 조언 같네요.

김: 물론 저 역시도 쉽지 않아요. 지도하면서 딜레마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석도 하나가 이렇게 움직여야 다른 쪽이 와서 달라붙잖아요. 지도자는 바로 그런 자석이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선수들의 아픈 곳을 긁어주기도 하고, 보듬어주기도 해야죠.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요. 무엇보다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BK: 말 안 듣고 속 썩였던 제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를 한 명만 꼽는다면, 누가 있을까요.

김: 이름을 언급하긴 그렇고, 투수로서 재능은 정말 뛰어난 데 감당하기 힘든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경기 중에 맘대로 안 풀리면 인상 쓰고, 교체하려고 공 달라고 해도 안 주고 그랬어요. 한번은 연습경기를 하는데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안 주니까, 화나서 공을 멀리 집어던진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대화하고 설득하려고 했죠.

BK: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 ‘네가 아쉬워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나도 투수 출신이라 네 마음을 100% 이해한다. 하지만 서로 간에 존중은 필요하지 않겠니’ ‘다음엔 이렇게 하지 말자. 감독님이 욕할 줄 몰라서, 화를 못 내서 안 하는 게 아니잖아. 너를 내 제자로 생각하고 사랑하니까 품고 가는 건데 그러면 너도 뭔가 보여주는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것 하나만 지키자. 그러면 넌 충분히 프로에 갈 수 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고, 그러다 밖에 데리고 나가서 고기도 한번 사 먹이고 했습니다. (웃음)

BK: 선수들이 밉진 않으셨나요.

김: 솔직히 그 애들이 무슨 잘못이겠어요.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방치한 어른들이 잘못인 거죠. 그 상태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지도하게 됐으니 힘든 일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코치들과도 ‘쟤들도 사람인데 우리가 정말 잘해주고 올바르게 대하면 나쁜 행동을 하겠느냐’고 얘기했어요. 이제 와서 그때 참 힘들었다고 하지만, 그 친구들이 밉지는 않습니다. 어찌 보면 야구 선수로서 기량은 좋은 친구도 많았는데 안쓰럽죠. 조금만 잘 다독이고 가르쳤으면 좋은 선수가 되고 좋은 팀이 됐을 텐데, 그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졸업한 친구들이 절 만나면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BK: 뭐라고 하나요.

김: 먼저 다가와서 포옹하고는 ‘그때는 죄송했다’ ‘속 많이 썩여서 죄송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울컥하죠. 참 힘들기도 했고, 말썽도 많이 피웠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아이들이에요.

BK: 이제는 야구부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봐도 되겠죠?

김: 한 3년 지나면서 야구부 분위기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4년째부터는 많이 좋아졌고, 5년째 되니 소리 지르는 횟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지금은 아예 언성 높일 일이 없어요. (웃음) 대전고 야구부만의 문화가 어느 정도 정착된 느낌입니다. 되돌아보면,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할 뿐입니다.

사진=베이스볼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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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에서 생 마감하는 게 꿈”

BK: 지난해는 대전고 야구부 창단 이래 최고의 한해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28년 만의 전국대회(대통령배) 우승도 우승이지만, 신인드래프트에서 무려 5명의 선수가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김: 3학년들이 워낙 잘해준 덕분입니다. 특히 3학년 야수들이 정말 좋았어요. 1번 타자부터 5번 타자까지 3학년 5명이 워낙 잘하니까, 6번부터 9번까지의 저학년들도 동반 상승 효과를 냈어요.

BK: 타선뿐이겠습니까. 투수력도 굉장히 탄탄했습니다.

김: 에이스 송영진도 좋았고, 언더핸드 송성훈 투수도 잘 던졌어요. 송성훈이 선발로 나가면 4, 5이닝은 1실점 미만으로 버텨주니 경기를 풀어가기 편했죠. 작년 멤버들은 야구도 잘했지만 다들 인성도 참 착했어요. 너무 예쁜 친구들이었습니다.

BK: 지난해 좋은 성과를 내면서 대전고를 주목하는 눈이 많아졌습니다. 부담되진 않으세요?

김: (손사래를 치며) 에이, 그것도 제가 풀어야 할 숙제 아니겠습니까. 성격상 미리 두려워하고 몸을 사리지는 않는 편입니다. 피하기보단 일단 부딪혀서 최선을 다하자는 주의에요. 지도자가 올해 멤버가 좋다, 약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그보단 목표를 정해놓고 선수들이 정점을 찍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BK: 좋은 지적입니다.

김: 그러다 결과가 16강에서 끝날 수도 있고 8강에서 멈출 수도 있지만, 잘 안됐을 때 실패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잖아요. 올해 우리 학교가 어느 정도 성적을 낼지, 몇 명이나 프로에 갈지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선수들에게 과정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단단한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합니다.

BK: 작년에 송영진이 에이스 역할을 했다면, 올해는 권일환 선수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권일환 선수의 성장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십니까.

김: 권일환의 장점은 유연한 투구폼입니다. 그리고 마운드 위에서 담대한 마음가짐이 돋보입니다. 2년 전 전국체전 때 군산상고, 세광고 상대로 2경기 연속 승부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당시 일환이가 막판 이닝을 혼자 다 막아준 덕분에 은메달을 딸 수 있었어요. 그 정도 위기면 웬만한 투수는 덜덜 떨고 숨을 몰아쉬고 할 법도 한데, 일환이는 1학년인데도 표정 변화조차 없더라고요. ‘긴장 안 돼?’라고 물어보니 ‘별 느낌 없는데요’ 하길래 속으로 ‘이 친구 스타성 있네’ 생각했죠. 아무리 좋은 공을 갖고 있어도 긴장해서 자기 공을 못 던지는 선수도 많잖아요. 얼마 전 발목을 다쳐서 연습량이 부족한 게 아쉽긴 한데, 분명히 장래성은 있는 선수입니다.

BK: 타자 중에는 3학년 포수 윤현우가 기대됩니다.

김: 윤현우도 괜찮아요. 어제오늘 연습경기에서 상대가 각각 두 번 도루를 시도했는데 하나씩 잡아냈어요. 우리팀 4번 타자로 장거리 타자는 아니지만 빼어난 컨택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발이 좀 느린 것만 빼면 나머지는 참 괜찮은 선수입니다.

BK: 마운드에는 박범준이라는 비밀 병기도 있죠.

김: 박범준은 원래 야수였다가 고등학교에 오면서 투수로 전향한 선수예요. 부상으로 운동을 쉬다가 최근 다시 투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연습경기에선 최고 140km/h까지 나왔는데, 경기를 지켜본 프로 스카우트 말로는 공 끝이 좋아서 140km/h 초·중반처럼 느껴졌다고 하더군요. 계속 던지다 보면 앞으로 점점 구위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BK: 마지막 질문입니다. 야구 감독이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감독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김: 제 꿈이 뭔지 아세요? 기력이 다할 때까지 야구장에 남는 겁니다. (웃음)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4학년에 야구를 시작한 뒤 평생 야구만 했어요. 야구 말고 다른 일을 한 건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삼아 막노동 몇 번 한 게 전부입니다. 돌이켜보면 인생 전체가 야구였던 것 같습니다. 만약 나중에 고교 감독을 그만둔다 해도 리틀이나 유소년 팀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을까 싶어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어린 선수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치다 야구로 생을 마감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가졌던 꿈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그게 제 꿈이 됐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요.

베이스볼 코리아 김지우, 배지헌 에디터(jhpae117@baseballkorea.kr)

베이스볼 코리아는 한국 유소년 야구, 고교야구 등 학생 야구를 기반으로 KBO리그 유망주와 스카우트, 신인드래프트 소식을 전하는 야구 전문 매거진입니다. 한국판 ‘베이스볼 아메리카’를 표방하며 지난 2019년 3월 창간해 오프라인 월간지와 유튜브 방송, 온라인 매체를 통해 풍성한 야구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꿈을 향해 땀 흘리는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과 현장 야구인들의 노력을 조명하고, 건전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베이스볼 코리아의 지향점입니다. 2023년엔 ‘MK스포츠’를 통해 많은 아마추어 선수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사진=베이스볼 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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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익 MK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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