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의 낭만이 갔다 [이근승의 믹스트존]

10월 30일 밤. 박태하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취재 목적은 아니었다. 박태하 감독에게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박태하 감독은 “고맙다”고 했다. 힘들지만 애써 짓는 미소가 느껴졌다. 그 외 별다른 말은 없었다. 서로 “고생하셨다”와 “고맙다”는 말을 반복하며 짧은 통화를 마쳤다.

박태하 감독에게 ‘포항 스틸러스’가 어떤 존재인지는 그가 포항을 이끌어 온 과정을 보면서 확실하게 느꼈다. 박태하는 포항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박태하 감독. 사진=이근승 기자
박태하 감독. 사진=이근승 기자

2024년 포항 감독 부임 첫해 코리아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뒤 박태하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박태하 감독은 “내 젊은 날을 바친 팀에서 감독 제안을 받았을 때 ‘이건 운명이다’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코리아컵 우승은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게 아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구단과 선수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포항은 K리그에서 구단을 가장 현실적으로 운영하는 팀 중 하나다. 연간 운영비와 선수단 연봉 등에 체계가 잡혀 있다. 구단이 한 해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과 투자 대비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돈을 쓴다. 지극히 상식적인 운영 방식이지만 K리그1, K리그2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보기 드문 팀인 게 현실이다.

일각에선 ‘포항이 투자를 더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구단이 지갑을 열어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설명하지 못한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설명하기 어렵다. K리그는 여전히 수익 모델이 뚜렷하지 않은 산업인 까닭이다.

포항 스틸러스 박태하 감독. 사진=이근승 기자
포항 스틸러스 박태하 감독. 사진=이근승 기자

박태하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포항을 위해 헌신했던 지도자다.

박태하 감독에게 “핵심 선수 이탈이 잦아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박태하 감독은 웃으면서 “그거 해결하라고 내가 이자리에 있는 것”이라며 “있는 선수들로 잘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2024시즌 코리아컵 우승과 2025시즌 K리그1 4위란 결과물은 구단의 투자 규모를 뛰어넘은 성과가 분명했다.

박태하 감독에게 사석에서 “더 큰 꿈을 꾸고 있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 박태하 감독은 “나는 이미 꿈을 이뤘다”며 “포항 감독으로 사는 하루하루가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또렷하게 기억난다.

오베르단. 사진=이근승 기자
오베르단. 사진=이근승 기자
이호재. 사진=이근승 기자
이호재. 사진=이근승 기자

2025시즌을 마치고 늘 그랬듯 포항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중원의 핵심이었던 오베르단의 이탈은 타격이 컸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서 2026시즌 여름 ‘주포’ 이호재까지 떠났다.

포항은 2021시즌 이후 5시즌 만에 K리그1 파이널 B로 향했다. 2026-27시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엘리트(ACLE)에선 3전 3패를 기록 중이다.

박태하는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선수 시절의 여파로 고관절 수술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작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시기를 놓쳤다. K리그1과 ACLE를 병행하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 수술을 미루고 또 미룬 까닭이다. 2026시즌 들어 박태하 감독의 안색은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축구계 관계자가 여럿이었다.

박태하에겐 몸도 마음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박태하 감독은 2024시즌 포항 스틸러스의 코리아컵 우승을 이끌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박태하 감독은 2024시즌 포항 스틸러스의 코리아컵 우승을 이끌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포항은 잘 모르겠다. 특히 과거의 영광을 기준점으로 지금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바란다면 진짜 모르겠다.

포항은 K리그 기준에서 정상적으로 구단을 운영하는 팀이다. 포항이 지금보다 더 큰 투자를 감행하며 높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면 많은 게 바뀌어야 한다.

그 시작은 운영비 확대다. 모기업을 설득할 만한 투자 이유를 제시하거나 구단이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

입장권 수익이 구단 운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정도로 늘어나야 한다. 스틸야드에선 ‘만원 관중’이란 단어가 익숙해져야 한다. 365일 포항의 신상 유니폼과 머플러 등 구단 상품은 없어서 못 팔 정도여야 한다. 그러면서 푯값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야 한다. 스폰서 제안도 끊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매년 수백억 원의 팀 운영비를 벌어들여야 한다.

포항에 그런 날이 오면 모기업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도 슈퍼스타를 앞세워 더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박태하 감독. 사진=이근승 기자
박태하 감독. 사진=이근승 기자

2026년 10월 30일. 포항의 낭만이 가고 현실만 남았다.

[이근승 MK스포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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