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2월 제14회 이탈리아 월드컵을 4개월 앞두고 이회택(78) 감독이 이끄는 한국축구대표팀은 1개월 여정의 해외 전지훈련을 나섰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김우중(2019년 82세로 별세) 대우그룹 회장이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2회 연속 본선에 오른 한국축구의 전력 증강을 위해 마련한 배려였다.
전지훈련지는 유럽팀들이 많이 찾는 지중해의 휴양지 몰타였고 카이로에서 이집트, 바그다드에서는 이라크와 평가전을 하느라 최순호, 정해원, 변병주 등 22명의 선수를 포함, 30여 명의 선수단은 잦은 이동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숙소에서는 밤마다 선수들의 방에 과일과 식수 등을 넣어 주는 임무를 팀의 막내였던 황선홍(56)과 홍명보(55)가 맡았다. 34년 전이니까 이들의 나이는 21~22세로 모두 대학생이었다.
당시 한 달간 현지 취재를 했던 필자의 눈에는 군말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의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이들은 베로나, 우디네 등 한국팀이 뛸 이탈리아 월드컵 경기장의 현장 답사와 스페인과의 친선경기를 위해서도 많은 공항을 이용했는데 그때마다 무거운 짐을 도맡아 옮기기도 했다.
물론 코치진과 고참 선수들도 이들을 돕기는 했으나 당시는 막내들이 궂은일을 전담하는 분위기가 오랜 전통과 관례처럼 여겨졌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지금도 크게 바뀐 것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데 이번 아시안컵 축구 4강전 한국-요르단 경기 하루 전인 2월 7일 루키 이강인(23·파리 생제르맹)이 주장인 손흥민(32·토트넘)과 몸싸움을 벌였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영국 매체 ‘더 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손흥민은 이강인 등 젊은 선수들이 이날 저녁 식사 후 탁구를 하러 먼저 자리를 떠나는 것을 막았는데 이 과정에서 충돌이 생겼고 손흥민은 손가락 탈구의 부상으로 다음 날 테이핑을 한 상태에서 경기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손흥민 김민재 황희찬 등 고참 선수들은 클린스만 감독에게 8일 요르단의 경기에 이강인을 제외해달라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클린스만 감독은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이나 분위기 파악보다는 외국에서의 재택근무에 더 관심 있는 사람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선수단의 선후배 위계질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후배가 ‘선배를 하늘처럼’ 모시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을 다치게 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탈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강인은 어린 시절 일찌감치 스페인으로 축구 유학을 떠나 유럽에서만 성장해 국내 축구계 사정에 어둡다는 말들도 있지만 주위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를 들어왔다.
일부 축구 팬들은 이강인을 향해 ‘다들 막내라 예뻐하고 스타된 거 같으니 기고만장하는 건가’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앞과 뒤가 다르다’ 등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축구계 원로 A씨(72)는 15일 “지난 50여 년간 축구계에 몸담아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이강인 선수에게는 2026 북중미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한 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의 빛이 뚜렷할 경우 복권을 시켜주는 징계를 내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15일 열리는 대한축구협회 전력강화위원회는 클린스만 감독의 경질 여부를 결정, 정몽규 회장에게 보고할 예정인데 그 귀추가 주목된다.
축구계에서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한국이 4강까지 진출한 것은 평가받을 만한 사안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그의 언행과 근무태도 등이 문제다”며 “이번 기회에 위약금을 물어주더라도 경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함께 “지난해 3월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클린스만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에 앉힌 정몽규 회장도 물러나야 한다”고 정 회장을 성토하고 있다.
축구계는 ”2026 북중미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축구협회를 재정비해 한국축구가 거듭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종세(대한언론인회 총괄부회장·전 동아일보 체육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