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23년 만에 세워질 것으로 기대했던 한국 남자 마라톤 최고 기록 수립의 꿈은 14.4km 지점에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2018년 케냐에서 귀화한 마라토너 오주한(35·충남 청양군청)의 마라톤 최고기록은 2016년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수립한 2시간05분13초. 하지만 이는 7년 전 기록이라 의미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지난 6개월간 해발 2300m 고지대인 케냐 캅타갑에서 2023 서울국제마라톤에 대비해 소화해낸 그의 강화훈련 풀코스 연습 기록은 2시간 6분대.
따라서 오주한이 이번 대회에서 이봉주(53)가 2000년 2월 13일 도쿄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07분20초의 한국 최고 기록을 무난히 경신할 것으로 보았는데 갑작스러운 허리통증으로 중도 하차하고 말았다.
하지만 허리통증이 일시적 현상으로 판명되면 4월에 열리는 대구나 군산 마라톤에 도전할 수 있어 한 가닥 희망은 남아있다.
19일 서울 광화문~잠실운동장 42.195㎞ 코스에서 벌어진 2023 서울국제마라톤 겸 93회 동아마라톤. 지난해 4월 17일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닌데도 이 대회 국내부에서 2시간11분16초로 우승했던 오주한은 착실한 동계 훈련을 바탕으로 이날도 초반부터 레이스에 자신감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첫 5㎞ 지점을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12명의 선두그룹에 끼어 14분 51초에 통과한 오주한은 7㎞ 지점부터 조금씩 밀려 10㎞ 지점은 박민호(24·코오롱)와 함께 선두그룹보다 5초 늦은 30분 24초를 찍었다.
하지만 12km 지점부터는 허리를 자주 만지며 통증을 느끼는 듯하더니 15km 지점을 600여m 앞두고는 경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2021년 8월 도쿄올림픽과 작년 7월 미국 유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중도 기권했던 악몽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오주한은 낙오자를 실어 나르는 회수차에 실려 잠실운동장 결승점 부근 마사지 룸에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허리통증이 계속돼 오임석 청양군 육상팀 트레이너의 승용차에 실려 청양의 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오 트레이너는 “지난 6개월간 케냐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견뎌낸 주한이의 갑작스러운 허리통증을 이해할 수 없다. 추위에 약한 주한이가 레이스 출발시간(오전 8시)의 다소 쌀쌀했던 날씨(기온 3.4℃)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싶다”고 말했다.
오 트레이너는 “주한이의 허리통증이 일시적인 것으로 판명되면 4월에 예정된 대구 국제마라톤이나 군산 새만금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한국 최고 기록 경신과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출전권 확보에 도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19일 열린 2023 서울마라톤대회에서 박민호와 정다은(26·K-water)이 각각 개인 최고 기록을 세우며 국내 남녀부 1위에 올라 9월 항저우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자격에 한발 다가섰다.
박민호는 이날 2시간10분13초로 자신의 종전기록(2시간11분43초)을 1분 30초 단축했다. 2019년 2시간15분45초, 2021년 2시간13분43초를 기록했던 박민호가 이제 2시간 10분 벽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정다은도 2시간28분32초로 자신의 종전기록을 4분 가까이 줄이며, 한국 여자마라톤 역대 9번째로 2시간 30분대 벽을 넘어섰다.
대한육상연맹은 올 1월부터 4월 사이에 열리는 국내외 마라톤 대회 기록을 살펴 항저우 대표 남녀 두 명씩을 선발할 예정인데 박민호와 정다은은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 셈이다.
이종세(용인대 객원교수·전 동아일보 체육부장)